제목: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지난 한달간 우리는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다윗 하면 떠오르는 수식어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A man after God’s heart’에 대해서 묵상함으로써 다윗 시리즈를 마감하려 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실 때 선지자 사무엘에게 다윗을 표현한 표현이요 (삼상 13:14), 훗날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에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면서 다시금 사용한 표현 (행13:22)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뜻을 다윗을 통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다윗에게서 메시아를 세우시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에서 예수를 세우셨습니다. 메시아의 직계 조상이 된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오직 다윗에게만 부여된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다윗은 이렇게 인류 중 단 한명에게만 주어진 축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이전부터 많은 신학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믿음을 주된 이유로 뽑았습니다. 실로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하게 주님을 신뢰한 믿음의 사람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다윗 외에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셨을 때, 자기가 그를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히11:19) 그의 믿음은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소위 믿음장으로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의 주인공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그 이름만 살짝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는 다윗의 특징은 겸손과 순종입니다. 그는 기본 성품 자체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묻고,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겸손과 순종이라면 모세도 빠지지 않습니다. 민수기는 모세의 겸손이 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했다고 증언합니다. (민 12:3) 모세의 순종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와 광야 40년을 지날 동안 한결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너무나 귀히 여기셨지만 다윗언약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용맹함과 강직함을 듭니다. 다윗은 블레셋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듣고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십대때부터 3미터가 넘는 골리앗 앞에서도, 사자와 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용맹함이라 하면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삼손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용맹함이 대단하지만 그것이 다윗만 갖고 있는 독특한 영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합은 아닐까요? 믿음도 좋고, 겸손하고, 순종하고, 용맹하고, 강직한 다윗을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자라고 여기시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만, 앞서 언급된 아브라함, 모세, 바울 등등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선조들은 대부분 이런 성품들을 종합적으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정말로 주목하고 우리가 가장 닮고 싶은 다윗의 영성의 특징은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 안에 머물고 동행하는 것을 최고로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84편에서는 가장 화려한 곳에서의 천 날보다 하나님 문지기의 하루가 더 좋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과 너무나도 친밀했던 사람. 이것이 다윗을 특징지어주는 설명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싶은 마음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 누리는 부귀 영화와 권세도 그리 중요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잃어도 그는 상관이 없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는 것은 그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과 함께 있고, 그 분을 묵상하다가 찬양하는 것이 그냥 너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본모습은 왕도 아니요 장수도 아니요, 목자요 예배자요 묵상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가끔씩 리더의 외로운 마음을 헤아리는 아랫사람이 있습니다. 리더들은 그런 사람을 만나면 감격하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합니다. 다윗은 온 인류 중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점점 그의 생각과 관점이 하나님을 닮아갔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 사울이 죽었을 때도, 불효자 압살롬이 죽었을 때도 그가 슬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눈만 뜨면 하나님만 생각하니까 그의 눈에 하나님의 법궤가 아직 텐트에 있는 것이 불편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약궤를 위해 성전을 짓고 싶어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세상 누구도 나를 걱정하는 자가 없는데 다윗은 나를 걱정한다며 그 마음을 기뻐 받으셨습니다. 메시아 언약은 이 때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볼 때 실수가 많았던 자였습니다. 그는 형과 아버지와 원만한 사랑의 관계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식들을 키우는데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실수가 많았기에 그의 인생에 굴곡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신뢰와 사랑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는 좋은 집안출신도 아니요, 외적으로는 훤칠한 형 엘리압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기독교 몇 대 손일 필요도 없습니다. 달변가일 필요도 없습니다. 찬양에 꼭 은사가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이비리그 나와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저 다윗처럼만 하나님을 뜨겁고 진실되게 사랑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에서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핑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받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사랑하십시요. 그것이 다윗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나눔질문 1. 지난 한달 동안 묵상한 다윗의 인생 가운데 가장 여러분의 마음을 터치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2.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너무나 좋아했고,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사랑하셨다는 메시지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도전과 어떤 용기를 줍니까? 3. 지금 나와 하나님의 친밀감의 상태를 1-10으로 스스로 점수를 매겨 보십시요.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고 싶으싶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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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생 최대의 실수
하나님의 이미지를 따라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죄를 선택하면서부터 타락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내면에는 죄성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과 구원을 입어도 여전히 죄성은 우리를 호시탐탐 넘어 뜨립니다. 그러나 죄에도 레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의 실수가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 최 절정기에 인생 최대의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길고 긴 징계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오늘 설교는 그의 실수에만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가 어떻게 이를 극복했는지에 집중하려 합니다. 이 묵상을 통해 우리도 원치 않게 실수를 범했을 때 주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 중일 때, 다윗은 부하들만 전쟁터에 보내고 예루살렘에 남아서 낮잠을 늘어지게 잤습니다. 그가 해이해졌을 때 사탄은 그를 유혹합니다. 그는 저녁에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녀는 전쟁중인 부하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유부녀를 범하는 것이 여호와께 죄가 되는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영적으로 해이해진 다윗은 계속 죄성을 따릅니다. 결국 다윗은 그녀를 범합니다. 한 번 죄를 지으면, 죄가 또 다른 죄를 부릅니다. 죄의 chain reaction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위를 숨기려 전쟁터에서 그녀의 남편을 불러들입니다. 십계명을 어긴 왕을 유대 사회가 수용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사울과 같이 자기 왕권을 지키려고 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아가 보통 충직한 부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쟁중인 자기 동료들을 생각해서 아내와 동침하기를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원래 다윗이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했으나, 한 번 죄가 그를 지배하자 그는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의 잘못을 밝히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실수는 이미 벌어진 것이지만,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다윗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였지만 그 실수를 잘 만회합니다. 그의 왕위는 회복되었고, 그에게 주신 메시아 언약도 성취되었습니다. 실수를 극복하는 다윗에게서 우리가 배울 것은 회개와, 책임지는 자세와, 인내입니다. 첫째, 회개는 회복의 전부입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는 회개해야 죄사함 받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 죄를 진정으로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깨끗이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일1:9)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은혜의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베푸십니다. 다윗은 지금 영적으로 엄청나게 빗겨나 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 전에 그를 축복했던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온 천하에 다윗의 죄를 드러내 버리십니다. (삼하 12:7-9) 이 때 다윗의 반응이 그를 살렸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다윗은 어떤 이유도 붙이지 않고 그대로 죄를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드러내실 때는 마음을 겸손히 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 기회를 놓쳐서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런 완고한 마음을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 (삼상 15:23) 그 후 다윗은 깊은 회개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회개의 다음 단계는 ‘적극적으로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잘못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친밀했던 시간 속으로, 하나님과 한 걸음씩 동행했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 책임지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마음의 회개 만큼이나 잘못된 상황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이는 율법 정신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한 것과 사람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집에 칼이 끊이지 않을 것과 그의 아내가 욕보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 일들이 다 이루어집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 다시금 광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고통의 시간을 그는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생겨난 자식이 죽는 슬픔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율법과 같이 우리아의 무고한 죽음은 죽음으로 감당하였습니다. 다윗의 인생 최대의 실수에 대한 모든 책임이 끝나는 데까지는 총 12년이 걸립니다. 그 오랜 기간을 그는 묵묵히 인내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로 옴을 알았기에 그는 겸손히 수용합니다. 주께서 높이신 자에게 주님은 더욱 큰 책임을 물으십니다. 다윗은 이를 끝까지 겸손하고 달게 받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긴 시간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죄에 대한 그의 책임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는 12년이란 세월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가 인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윗이 다시금 하나님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관계 가운데로 완전히 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다윗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겠지만, 징계받는 가운데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가운데서도 우리 영을 만지시고, 회복시키시고, 북돋아 주십니다. 이 경험이 대단히 독특해서 징계의 과정을 경험해야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는 축복입니다. 다윗은 이 시기에 평생 중에 가장 겸손한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까지 주님께 맡기고, 징계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영성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질문 1. 다윗의 죄를 온 천하에 드러낸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죄를 드러내신 경험이 있나요?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2. 전도연 주연의 ‘밀양’은 죄인이 하나님께만 용서함 받으면 사람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태도가 맞는지에 대한 논란을 우리 사회에 던졌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 이것이 성경적이지 않은 이유를 나눠보세요. 3. 징계의 시간 속에서 징계하시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시나요?
15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말했습니다. “혹시 요셉이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했던 모든 잘못에 대해 앙갚음을 하면 어떻게 하지?” 16 그들이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우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17 ‘정말 간절히 부탁한다. 비록 네 형제들이 네게 악을 행했어도 너는 네 형제들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어라’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아우님, 아버지의 종들, 하나님의 종들이 지은 죄를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요셉은 이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18 그때 요셉의 형제들이 와서 그의 앞에 엎드리면서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19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20 형님들은 저를 해치려고 악을 꾀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2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식들을 기르겠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안심시키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를 보존하시고,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시며, 만물을 정한 목적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손수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를 믿는 믿음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과 개인에게 일어난 일을 영적 시각으로 느끼고 해석할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연법칙이나 우연으로 해석하겠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성도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A.W. Tozer)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두 가지 (섭리 혹은 우연) 다 해석이 가능하기에,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지는 결국 믿음과 선택의 영역에 속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증명하시거나 설득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주신 영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고, 깨달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점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만 투영하시는 분이 아니라, 비록 죄 많고 부족한 피조물이라도 그들의 뜻과 결정을 존중해 주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섭리의 3요소 (보존, 통치, 협력)에서도 잘 알 수 있는데, ‘보존’은 하나님이 만물을 보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며 (히 1:3), ‘통치’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하신 존재 목적에 맞게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33:11-14) 가장 중요한 ‘협력’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의 생각과 의지와 협력하여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잠 19:21)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아, 다른 형제들이 받지 못한 색동옷을 받은 특별한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순진한 요셉은 이를 형들에게 자랑하여 가뜩이나 질투심에 가득 찬 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이집트의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요셉은 옥에서 만난 술관원의 꿈을 해석해 준 일이 계기가 되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일약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에서 보여준 대로 다가올 흉년을 대비함으로써 이집트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많은 사람들, 게다가 자기 가족의 목숨을 구하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섭리의 라틴어는 provideo인데, 이는 ‘미리 알고 대책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하신 일이 바로 ‘섭리’ 인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을 매정하게 이집트로 팔아 넘긴 형들과의 관계였습니다. 이 일은 요셉이 겪은 그 어떤 일보다 더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요셉의 깊은 상처와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19-21절을 보면 요셉은 자신의 비극적 상처를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에게 형들의 악한 계획을 허용하셨는지 요셉은 이미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보존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켜졌으며, 형제간의 화평이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이 섭리의 결과입니다. 또한, 요셉 자신에게도 아픈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이 재해석되면 상처는 치유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조차 심판자의 자리에 서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를 끼친 사람과도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롬 8:28)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섭리 신앙’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내 삶을 확실하게 이끄시고 책임지고 계심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어지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시 84:11, 렘 32:28) 둘째, ‘역경 속에서 인내’ 할 수 있게 됩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을 신뢰하며 우리는 소망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시 39:9) 슬픔 속에서 고요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골 1:11) 셋째, ‘기도의 용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협력’적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때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고, 기도를 명령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지의 미래를 향한 소망의 빛’을 밝혀 줍니다. 특히 청년의 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에 대한 선하신 뜻과 계획을 다 갖고 계십니다. 이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선하게 풀어가실 것입니다. 그것을 다 이루실 때까지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드리는 삶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붙잡고, 영안으로 세상으로 바라볼 줄 알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는 복된 인생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오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그동안 오해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은 쓰지만, 섭리의 결과는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경험담을 함 께 나눠보세요. 3. 설교에서 제시한 섭리의 유익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면 함께 나눠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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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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