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모르드개
오늘 저희는 에스더를 에스더로 만든 사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하심의 통로 역할을 한 사람, 모르드개의 삶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모르드개는 페르시아 수산궁에 사는 유대인이었으며, 그는 왕궁의 문지기 관료였습니다. 그는 원래 유대땅에서 출생했다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자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고, 특별히 사울 가문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자가 왕궁의 관료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재능과 능력이 있고 신뢰할만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많은 유다인들은 고레스 왕 때 유대땅으로 복귀하였지만, 모르드개를 포함한 일부는 이미 삶의 터전이 된 페르시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남겨진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회복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하였으며, 여전히 이방신을 섬기는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재능과 경제능력이 뛰어나 부와 지위를 얻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현지인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때에 따라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론 감추기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모르드개의 삶의 첫번째 전환점은 에스더가 왕후가 된 사건입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동생이었는데, 고아인 에스더를 모르드개는 자기 딸과 같이 양육합니다. 그러다가 아하수에로 왕이 새로운 왕비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에스더도 차출되었고, 수 많은 처녀들 가운데 에스더가 왕비로 선발됩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사건은 당시 낮은 관료였던 모르드개에게 큰 일이었습니다. 그는 에스더를 통해 왕과 간접적으로 소통할 채널이 생겼습니다. 이 때, 마침 왕의 두 내시가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것을 모르드개가 알게 되어 에스더를 통해 이 일을 왕에게 알려줌으로써 왕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훗날 일어날 일의 복선이 됩니다. 모르드개의 두번째 삶의 전환점은 악한 하만이 페르시아의 총리가 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말렉의 왕족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만과 모르드개는 민족적 뿐 아니라, 가정사적으로도 철천지 원수지간입니다. 이런 하만이 총리가 되어 모르드개의 상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만에게 무릎 꿇거나 절하지 않았고, 이 일로 인해 하만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자기 행동의 원인을 유대인의 율법 (예, 십계명 1, 2항)에 두고 있습니다만, 정황을 잘 살펴보면 그의 개인적 감정도 분명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만은 크게 분개하여 페르시아에 남은 모든 유대인을 진멸하는 왕의 조서를 받아, 이를 모든 지방에 보냅니다. 모르드개를 포함한 유대인들은 큰 슬픔에 빠집니다. 이 소식이 왕비 에스더에게 알려졌을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비로서 왕에게 나가 유다백성을 구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이 요구는 당시 왕실의 법령을 어기는 과한 것이었지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기도하며 왕 앞에 나가 왕과 하만을 자기 집으로 초청합니다. 모르드개 인생의 마지막 터닝 포인트는 에스더가 왕과 하만을 초청한 둘째 날 벌어집니다. 첫날 만찬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자, 에스더는 다음 날도 왕과 하만을 초청합니다. 그날 밤에 놀라운 두 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높은 나무장대를 세운 것과, 다른 하나는 왕이 우연히 역대 일기를 읽다가 이전에 있었던 내시 반란 사건을 모르드개가 막았던 일과, 그가 아무런 포상을 받지 않았던 일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왕은 그 날 모르드개를 왕복과 왕관을 씌워 왕의 말을 태우고 온 성을 돌면서 ‘왕이 존귀히 여기는 자’라고 반포합니다. 아이러니하게 이 일 반포한 자는 하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르드개를 죽이려는 하만의 입을 통해 모르드개를 높이신 반전을 시작하십니다. 집에 돌아온 하만은 상황이 반전됨을 느끼며 싸한 감정을 갖고 에스더의 두 번째 만찬 초청에 참석합니다. 그 자리에서 에스더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멘트를 왕에게 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민족을 살육하려는 자가 바로 흉악한 하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 준비한 장대에 하만 자신을 달아 처형하고, 그의 재산을 에스더에게 돌립니다. 에스더는 왕의 조서를 바꾸는 새 조서를 내리도록 허락받아 내렸고, 그에 따라 하만의 열 아들도 하만과 같은 죽음을 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을 공격하려던 모든 자들도 하만과 똑같이 진멸되고 재산이 몰수되는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리는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부림절을 지키며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에스더서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책에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모르드개와 에스더 뒤에서 역사하신 분은 분명하게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르드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의 통로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현실도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비록 그럴 때라도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르드개를 보자면, 그는 인간적으로는 거칠고 실수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에스더에게도, 심지어 하만에게도 굉장히 거칠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가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은 것은 그의 종교적 신념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포함된 결정이었습니다. 그의 이 행동으로 인해 온 이스라엘은 큰 위험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런 실수보다 더 중요한 점은, 모르드개는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와서도 평생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변치 않았습니다. 그는 제국의 2인자와 대적해야 하는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란 믿음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인생의 가장 큰 위기 앞에서 오직 하나님을 붙잡은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위기의 순간에 “죽으면 죽으리다”고 결심할 수 있는 배경에는 자신을 키워준 모르드개의 신앙 교육이 작용한 것입니다. 또한,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스더가 왕비가 된 것을 우연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을 암살기도에서 보호하고도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런 것에 전혀 동요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았기에 하나님은 결정적인 때 그를 들어 포상을 한 것입니다. 모르드개와 같이 우리도 인생에서 실수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실수보다 중요한 것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심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 중심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면 그의 실수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은 계속 해야겠지만, 실수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우를 범하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르드개와 같이 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 삶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을 경험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질문 1. 에스더가 우연히 왕비가 되고, 왕이 우연히 모르드개의 일을 본 것과 같이 내 삶에서 우연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2. 모르드개가 겪었던 위기 앞에서도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을 굳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삶의 실제적인 위기에 이것을 접목해 본다면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요? 3. 여러분은 나의 크고 작은 실수에 스스로 실망하시진 않으신가요? 그 때조차 중심을 하나님께로 향한 모르드개를 통해 여러분이 배울 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추가, 이 말이 ‘어차피 중심이 중요하니, 나의 실수는 무시해도 좋다’는 것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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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삼상 13:8-14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인물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지만 그 다음 왕인 다윗과 항상 비교되는 인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사울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은 사사시대의 마지막 시대였습니다. 신정국가 체제로 출범한 이스라엘에는 인간 왕이 없었습니다. 주변국의 침입과 같은 국가적 위기시에는 백성을 다스릴 리더, 즉, 사사를 세웠습니다만 그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사사입니다. 그가 나이가 들었을 때 그의 아들들은 백성의 신뢰를 받지 못했고, 다른 유력한 사사는 출현하지 않았는데 주변국의 침략이 잦았습니다. 이 때 백성들이 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이 요구를 기뻐하시지 않으셨지만 들어주셔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셨고, 그 초대 왕으로 택함받은 인물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인데, 베냐민은 야곱의 막내아들이기도 하고, 사사시대 후기에 레위인의 첩 살해사건으로 인해 거의 그 씨가 끊길 뻔한 지파였습니다. 게다가 사울의 집안은 베냐민 지파 안에서도 유력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용모가 출중하고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뛰어나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지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은 왕으로 기름을 붓게 하시고, 후에 공개적으로 제비를 뽑아 왕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초대왕으로 추대된 사울은 통치 초반기에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통치기반을 든든히 하고, 백성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추락은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번의 결정적인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 두 사건은 블레셋과의 전투와 아말렉과의 전투였습니다. 먼저, 블레셋과의 전투입니다. 블레셋(팔레스타인)은 당시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의 숙적이었습니다. 그들이 군사를 모아 진영을 치고 전쟁을 걸어올 채비를 갖추고 있을 때,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점점 더 상황은 나빠지는데 사무엘은 약속한 날짜를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사울은 하나님께 올려드릴 제물을 잡아 본인 스스로 제사를 드립니다. 이는 왕과 제사장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한 율법에 어긋난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뒤늦게 온 사무엘은 그 모습을 보고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질책합니다. 이 일로 인해 사울 가문의 왕위가 길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주의 마음에 합한 다른 자를 왕으로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불순종은 이어지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벌어집니다. 비록 사울의 왕위가 크게 타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사울은 하나님이 세운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중요한 명령을 하십니다. 이미 출애굽 초기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진멸하라는 명령입니다. (헤렘 명령) 그런데 사울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아말렉의 아각 왕을 포함하여 가장 좋은 숫소와 양들을 진멸하지 않고 남깁니다. 얼마 후 사무엘이 그 장소에 오자,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남겼다고 변명합니다. 그 때, 사무엘은 너무 유명한 말인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며 그를 강하게 질책합니다. 이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왕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습니다. 하나님은 이후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거두어 가셨고, 사울은 심한 악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영적 분리, 즉 영적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새 왕을 세우시는데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비록 사울이 죽을때까지 40년간 왕좌에 있기는 하였지만, 이미 그의 왕권은 허수아비같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왜 사울을 버리셨는지, 사울이 다윗에 비해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불순종의 죄를 지었으며, 그 마음에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항상 남 탓을 하며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반면교사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주목해서 보고 싶은 것은 조금 새로운 부분입니다. 내 안에 있던 화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 비해 유독 사울에게 엄격하시지 않으셨나’ 하는 궁금증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잘못을 잘 들여다보면, 결코 사울의 잘못보다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유독 사울에게는 엄격하셨는지에 대해 여러 묵상을 하던 중, 주께서 주신 귀한 깨달음을 나누겠습니다. 그것은 ‘사울은 율법아래 있고, 다윗은 은혜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시대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율법의 언약 관계로 들어갔습니다. 율법은 크게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율법의 기본정신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강제성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처벌이 따릅니다. 이것이 극단화 된 것을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율법관은 상당히 율법주의적으로 치우쳤습니다. ‘순종하면 축복받고, 불순종하면 징계를 받는다’는 신명기 28장의 율법관념이 모든 신앙관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율법언약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언약입니다. 광야시대도, 사사시대도, 사울도, 심지어 포로귀환시대에도 율법은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은 대단히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다윗이 은혜 아래 있는 것이 독특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는 다윗 언약을 새롭게 주십니다. (삼하 7장) 이 언약은 하나님이 다윗을 은혜로 택하시고, 목동이었던 그를 일방적으로 높이셔서 존귀한 자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무런 자격 없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율법시대부터 이어진 명령과 복종, 율법과 순종의 관계가 은혜와 감사를 통한 인격적 관계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 언약의 뒷부분에는 왜 하나님이 다윗에게만 은혜의 언약을 베푸셨는지 그 비밀이 밝혀집니다. 그것은 그의 씨에서 메시아를 탄생시키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은혜로 대하신 것은, 다가올 메시아의 역할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메시아는 율법의 언약을 은혜의 언약으로 전환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메시아를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가 끊어지고, 모든 율법의 묶임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윗과 같이 대하시기 원하시고, 다윗과 맺으신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는 우리는 다윗의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를 더욱 깊이 맺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때론 아버지의 마음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죄를 짓게 되더라도 겸손하게 엎드려 회개하고 주님의 징계를 견디어 내야 합니다. 사울은 이 비밀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가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 삶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율법 아래 있게 됩니다. 예수님 붙잡지 않으면 은혜가 없습니다. 사울의 인생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프리즘으로 보게 되십니다. 다윗의 삶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율법 아래 거하는 복된 인생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 질문 1. 사울을 통해서, 율법 아래 있는 삶과 은혜 아래 있는 삶의 비교가 더 확실해진 부분이 있으신가요? 2. 나는 내가 은혜 아래 있다고 확신합니까? 누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3. 은혜 아래 있는 내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같은 행동과 태도가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봅시다.
제목: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영원한 청년, 갈렙
수 14:6-12 갈렙은 여호수아의 동료이자 동시에 그의 경쟁자였고, 평생을 2인자로 살면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전부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갈렙 조상의 출신배경은 그니스(그나스) 라고 불리는 에돔지역 출신 이방인이 유다족속으로 편입한 사람이었습니다. 혈통을 중시 여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러한 출신적 배경은 그의 출세에 큰 제한사항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열 두 지파 중 맏아들 격인 유다지파 사람이었지만, 그의 출신은 이방인이라는 짊을 평생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갈렙의 삶에 있어 가장 큰 터닝포인트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열 두 지파의 리더들을 뽑아 정탐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이 때, 유다지파에서 갈렙이 선발된 것입니다. 이것은 일개 이방인 후손 갈렙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탐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듯 좋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에 사는 족속들은 크고 강하며 그 성읍은 견고하여, 우리는 이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백성들을 중재하러 갈렙이 나섰습니다. 그러나 일단 돌아선 민심을 갈렙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난 군중들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일은 매우 심각한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부정적 보고를 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으며, 불신의 원망을 한 출애굽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유린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아서 그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이 둘과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자신들의 눈 앞에 펼쳐진 상황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프리즘을 통해 볼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을 통하여 갈렙은 이방인 출신 유망한 젊은이에서 일약 국가급 리더로 주목받게 됩니다. 말 그대로 화려한 데뷰를 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광야 40년간 갈렙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성경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기를 간과하곤 하는데, 이 기간의 갈렙을 이해해야 진정한 그의 면모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데스바네아의 영웅 갈렙은 광야 40년간 마치 그림자처럼 무대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반면, 이 시기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차근 차근 쌓아 갑니다. 그는 아말렉과의 전투의 공신이었으며,모세와 함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한 유일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명실상부 하나님과 모세가 택한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로 세워집니다. 반면, 갈렙은 이스라엘은 커녕 자기 지파인 유다의 지도자도 되지 못합니다. 여전히 유다지파의 장은 나손이었습니다. 갈렙은 자기 동료인 여호수아는 승승장구하고, 자신은 쪼그라드는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갈렙 입장에서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인 여호수아보다 유다지파인 자신이 차기 리더로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할 여지도 있었습니다. 믿음 면에서나, 용기 면에서나 그는 여호수아보다 부족한 것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비관적인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리더가 되지 못한 것을 자신의 혈통문제로 치부하며 큰 낙심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갈렙은 유다지파 내부의 불신도 이겨내야 했습니다. 맏형 지파인 유다지파 입장에서는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밀리자, 그가 지파의 리더로서 자격이 충분한 지 의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그는 광야 40년 내내 지파의 리더역할조차 맡지 못하게 됩니다. 갈렙의 위대함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자기 분수를 지키고, 여호수아를 존중하며, 자기지파 수장 나손을 따르면서 묵묵하고 신실하게 자기 위치를 지킵니다. 광야 40년 세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 모세는 갈렙을 “여호와를 온전히 따르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데 이것이 갈렙의 광야 시간 40년을 총평 해줍니다. 갈렙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소명”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미 가데스바네아 사건 때 갈렙에게 이스라엘의 특정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 땅은 후에 그의 고백에서 나온 것처럼 헤브론 산지였습니다. 갈렙은 이 사명에만 집중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비교하지 않고, 나손과 경쟁하지 않고,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사명에만 집중했기에 그 오랜 시간동안 신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의 크기는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크게 쓸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작게 쓸 그릇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소명의 크기보다 그 소명의 자리에서 얼마나 충성되고 헌신되었느냐가 하나님께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울왕의 소명은 컸지만 그는 그 소명을 아름답게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그는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의미있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갈렙은 이 지혜를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정적으로 힘들 수 있는 그 시기를 오직 자기 소명에 집중하며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시기의 갈렙이 정말로 존경스럽고 따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갈렙 인생의 꽃은 노년에 피게 됩니다. 광야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드디어 그는 유다 지파의 수장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그를 지명하셨습니다. 이 후 그는 여호수아의 2인자가 되어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 기간 동안 그의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감당합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완료되었을 때, 비로서 그는 여호수아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평생 가슴 속에 간직한 소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대로 헤브론 산지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를 축복하며 그 산지를 갈렙에게 줍니다. 그 땅에는 여전히 아낙자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쪼그라들게 만든 “메뚜기 신드롬”의 장본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45년전부터 이스라엘의 감정적 자존감 회복의 도구로 갈렙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명이 여호수아의 사명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그는 이 사명 때문에 나이가 85세인데도 아플수조차 없었습니다. 전쟁을 해야만 하기에 그는 평생을 청년처럼 건강을 관리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소명의식이 그를 영원한 청년으로 만든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헤브론 산지의 모든 거인족들을 정복하고 자기 소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수14:15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갈렙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명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상황이 좋던, 좋지 않던 자기 근본이 흔들리지 않은 한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단 한마디로 설명 가능합니다: “헤브론.” 바로 주께서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멋지게 인생 노년에 그 소명을 완수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수아에 견주어도 전혀 부족함 없는 너무나 멋진 우리 신앙의 선배입니다. 이런 귀한 인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묵상 질문 1. 내 눈 앞에 아낙 자손은 무엇입니까? 나는 열 명의 정탐꾼인가요, 갈렙인가요? 2. 내 인생의 “여호수아”는 누구입니까? 그를 향한 내 마음은 솔직히 어떤가요? 3. 내 삶의 “헤브론”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내 가슴을 사로잡고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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