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샬롬!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의 3대 사역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가르치는 사역(Teaching), 치유하는 사역(Healing), 전파하는 사역(Evangelizing)을 가리킵니다(마 4:23). (예수님의 3대 사역을 세 영어 단어의 앞 글자를 따서 ‘예수님의 THE 사역’이라고도 합니다.) 오늘은 3대 사역 중 ‘전파하는 사역’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일에 집중하실까요? 그것은 복음의 연속성과 확장성 때문입니다. 복음은 시대를 넘어 연속되어야 하고, 지역을 넘어 확장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선포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넘어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제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킵니다. 전도는 무엇인가요? 전도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3장),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범죄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양같이 각기 제 길로 떠났습니다. 눅 15장의 둘째 아들(탕자)처럼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잃어버린 존재’, ‘잃어버린 영혼’으로 여기십니다. 분명히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십니다. 마치,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탕자)을 가리켜 아버지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눅 15:24).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으로(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며 전도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전도해야 하고, 회개와 천국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마 4:17).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전도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시대 읽기를 통한 전도’를 해야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의미(meaning)’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삶의 진정한 희망을 갈망합니다. 복음은 이들에게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고(영생과 함께, 우리 삶을 풍성한 의미로 채우시고, 요 10:10), 우리의 참 희망(영혼의 닻 같은 소망, 히 6:19)이 되십니다. 전도를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전도하기 전에 새벽 미명에 조용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없이 전도는 불가능합니다. 2022년을 마무리하고 2023년을 준비하는 오늘, 우리 삶이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전도의 열정으로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THE 사역은 교회의 THE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THE 사역을 멋지게 펼쳐가는 AKPC 청년부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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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열방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마 2:1-12)
어느덧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2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는 성탄주일 4주전부터 대림절 기간으로 정하여서 온 인류의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의 고귀한 탄생을 마음속으로 기념하고, 앞으로 다시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를 지킵니다. 예수님 탄생에 대한 말씀은 성경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올 해는 마태복음 2장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어떻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동방박사의 방문에 초점을 맞춥니다. 동방박사는 갈데아 (바빌로니아) 지역의 천문학자 혹은 점성술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체의 특이한 변화를 읽고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자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특별한 별을 관찰하였고, 이것이 왕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신하여 그를 경배하고자 먼 여정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예루살렘 방문은 헤롯왕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큰 소동거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왕권에 민감했던 헤롯왕에게는 대단히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세상의 왕권에 대한 갈등구조로 그리고 있습니다. 헤롯왕은 아기 예수를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하여 아기가 태어난 시기와 장소를 수소문합니다. 특히, 그는 동방박사들을 ‘몰래’ 불렀는데 (7절) 이는 그가 이미 아기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헤롯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보호하시고자 직접 개입하십니다. 처음에는 동방박사들의 꿈에 나타나 헤롯에게 가지 말도록 지시하시고, 이어서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를 데리고 빨리 이집트로 피신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베들레헴의 어린 사내아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또한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고 있음이 그저 놀랍습니다. (렘 31:15) 이처럼, 예언에 입각한 예수님의 왕권은 인류를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세상 정치에 입각한 헤롯의 왕권은 무고한 피를 부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신 분이신지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고,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그리스도) 이십니다. 본문 5-6절에서 보듯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도 메시아를 알았고, 그를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메시아의 오심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야말로 성경의 예언대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고, 이사야 예언처럼 처녀가 잉태하여 태어났으며, 헤롯을 피했다가 애굽에서 불러내심을 받았고, 나사렛에서 자라 나사렛 사람이라 불린 진정한 메시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온 세상의 통치자요,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주의 백성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가 메시아임은 동방박사가 예수께 드린 선물에도 잘 드러납니다. 황금은 그 순수함과 희귀성 때문에 예부터 왕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유향은 대제사장이 소제 (곡식제)를 드릴 때 항상 사용하는 향품으로서, 예수가 대제사장이심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구약시대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부은 관유를 만드는 핵심 성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상징합니다. 결국, 마태복음 2장은 예수님이 구약성경 내내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이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잉태되실 때부터 모친이 돌에 맞아 죽을 위기를 감수하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는 고향 갈릴리(나사렛)를 떠나 베들레헴으로 이동하셨어야 했고,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 했어야 했습니다. 공생애 기간에도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배척 받고, 예루살렘에서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죽을 위기를 수 없이 넘기셔야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이룬 것들은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쉽고, 당연한 일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끊임없이 넘기셔야만 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메시아 사역을 순종과 믿음으로 완성하신 분, 우주적 영적 전쟁에서 진정으로 승리하신 승리자, 바로 이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는 다시 오실 만왕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온 열방의 왕으로 오신 모든 인류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부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왔지만, (십자가의 패, ‘유대인의 왕’) 동시에, 그는 ‘온 인류의 진정한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그를 경배하러 온 사실이 이를 정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의 믿음 없는 동방박사들에게도 온 인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누가는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유대인이 종교 지도자가 아닌 목동임을 전함으로써 예수 탄생의 기쁨에 지위의 높고 낮음이 상관없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은 인종, 언어, 문화, 사회적 계층, 종교까지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진정한 빛과 소망이 되는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곧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이 큰 기쁨의 소식을 누구와 나누고 싶으십니까? 어떻게 나누고 싶으십니까? 이를 준비하는 의미있는 대림절을 보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눔 질문
말씀: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마 7:21-27)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십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만 그 의미를 좀 더 살펴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반석이란 성경 말씀을 의미합니다. (24절) 이를 좀 더 확장해보면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입니다. (고전 10:4) 그렇다면 모래란 말씀과 예수가 아닌 다른 것, 즉 세상의 가치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집을 짓는다는 의미는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삶 전체를 살아내는 것,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잠 24:3, 삼상 25:28) 즉, 기초를 닦은 이후 삶을 완성해 가고, 그 과정에서 신앙과 인격이 성숙되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란 말씀은, 첫째, 우리 삶의 기초를 하나님 말씀에 두고 그 삶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말씀이란 먼저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가리키고, 더 나아가 신구약의 모든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주께서 친히 최고의 권위를 두신 영의 양식으로서 우리를 바르게 훈계하고 인도하는 초석이 됩니다. 둘째, 반석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21, 24절) 말씀을 아는 것과 이를 실천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눅 6:46) 단순히 아는 것은 지식에 머무는 신앙입니다. 근데 이를 실천하려면 우리의 의지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실천적 신앙 이야말로 전 인격적 신앙입니다. 성경은 이를 건강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어찌보면 모래 위에 집은 지은 자도 반석이 더 좋은 것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그렇게까지 어렵게 집을 짓지 않으려 하였기에 손 쉬운 모래 위에 집을 짓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초를 말씀에 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귀담아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말씀 읽기 습관은 건강하십니까? 이어서 그것을 삶에서 살아 내야 합니다.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삶에서 살아내려 노력하는지 솔직히 되돌아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역경을 이겨내는 신앙을 말합니다.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의 차이는 홍수가 날 때입니다. 홍수는 인생의 풍파, 즉, 삶의 역경을 의미합니다. (27절) 영적으로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안 좋은 일 세 가지만 겹쳐 오면 낙망하여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만큼 환난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의 자녀가 되었다고 환난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마 24:8-9) 도리어, 성경은 그 환란을 이겨내라고 강하게 말씀합니다. (마 24:13) 하나님이 주의 자녀된 우리에게 여전히 환란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를 천국백성에 합당한 자, 하늘의 상급을누릴만한 자로 빚어 가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참고 이기는 자에게 의와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딤후 4:7-8, 약 1:12, 벧전 5:4) 이처럼, 환란 없이 영적으로 성숙하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롬 5:3-4)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환란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루고,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환란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인생의 풍파가 몰아쳐도 그것을 능히 이깁니다. 왜냐면 반석되신 예수님이 폭풍우 속에서 그 집을 든든히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초되는 성경말씀이 환란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반복해서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 (시 34:17-21) 이것이 반석이 주는 힘입니다. 우리가 환란 가운데 있을 때 부르짖는 기도는 “911 기도”입니다. 큰 어려움 가운데 부르짖는 기도를 주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면 주님이 싸이렌을 키고 여러분께 달려오실 것입니다. 이를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기초가 반석위에 든든히 세워져 있습니까? 이를 알기 위해선 환란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나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어려워져도 신앙이 흔들린다면 아직 우리 기초가 반석 위에 굳게 세워지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기초를 좀 더 든든히 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기초를 세우고, 그 말씀을 의지적으로 실천해 나가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 삶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되어 갈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모두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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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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