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구원받은 공동체의 모습
본문: 골 3:5-17 (봉독: 3:12)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우리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참 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는 교회에 집중하고 계십니다(마 16:18, 고전 3:16, 마 18:20). 우리가 우리 공동체를 이해할 때에도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세 가지 부르심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성도’로 부르십니다(고전 1:2, 신 7:6, 시 4:3). 다음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십니다(요 1:12, 엡 1:5). 마지막으로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로 부르십니다(계 21:2, 요 3:29, 고후 11:2). 이 부르심의 공통점은 모두 개인이 아닌 성도의 모임, 즉 교회 공동체를 부르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문제가 많은 교회를, 이미 성도요, 거룩한 자녀요, 순결한 신부라고 완료형으로 부르십니다. 이렇게 보시는 근거는 여호와께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이미 택하셨기 때문입니다(엡 1:4). 교회에 대한 이 정체성을 우리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차이가 날지라도,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증거하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Psalm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거룩을 잃고, 세속화되며,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마음판에 깊이 새기는 귀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 이 자리에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과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교회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핵심적인 권고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 입니다(골 3:5, 9-10). 성도의 삶은 예수님 믿기 전에 하던 습관, 세상에서 익숙하게 하던 버릇, 육신적 욕망의 충동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서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도록 가르쳐주고, 격려해주고, 잘못하면 바로잡아주고, 서로 기도하고 권면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옛 습관을 버리려는 노력’과, ‘새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분위기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교회란 이런 분위기가 잘 정착된 교회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을 갈라디아서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로 조금 다르게 표현합니다. 육체의 일은 음행과 더러움과 방종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 취함과 방탕과 또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갈 5:19-21). 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여러분 자신은, 여러분의 목장은, 우리 청년부는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바울은 새사람된 공동체가 따를 좀 더 구체적, 실질적 권면을 계속해서 열거합니다(골로새서 3장). 첫째, 말 (우리 입)을 신중하게 다룰 것을 말합니다(골 3:8-9). 기도나 말씀보다 우선해서 말을 주의할 것을 강조한 것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공동체 관계를 오래 겪어 본 사람들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 공감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바울은 남을 비방하는 말을 금하고, 거짓말을 버리고 서로 진실된 말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둘째,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합니다(골 3:13-14). 용납하는 마음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려면 먼저 용납과 사랑을 받고, 나를 지키려 스스로 만든 마음의 방패들을 내려놓아져야만 진정한 내면의 변화가 생깁니다. 용납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공동체에게 받아들여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변하고 성숙해지는 공동체가 되려면,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용납과 허용은 다릅니다. 비록 잘못된 것을 알지만 성숙해 가는 과정 가운데 있기 때문에 기다려주는 것이 용납인데, 이를 허용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따라서, 용납을 받는 사람은 어려워도 잘못된 행동을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용납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도 하나님께 용납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강조합니다. 사랑이야말로 불완전한 우리들을 온전하게 묶는 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서로 말로 존중하고, 잘못을 용납하고, 사랑의 띠로 단단히 묶이면 그 공동체에 오면 마음이 편합니다. 즉, 셋째 “평강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골 3:15). 평강은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리트머스입니다. 왜냐면, 평강은 영적 안정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개인과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 계실 때 우리는 평강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바울은 공동체에 말씀이 풍성해야 함을 말합니다(골 3:16). 바울이 말씀의 풍성함보다 태도의 부분부터 먼저 강조한 것은 그만큼 공동체가 올바른 태도와 마음자세를 갖추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봐도 결국 열매의 차이는 씨앗(말씀)의 차이가 아니라 토양(마음)의 차이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공동체에 대해 다소 우려스러운 말들이 들려옵니다. 저는 우리 Psalm 공동체가 ‘옛 사람을 벗으려는 노력’과 ‘새 사람을 입으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교회는 교회 다워야 합니다. Psalm 공동체는 바로 여러분이 만들어 가는 여러분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은 Psalm 공동체를 어떤 공동체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이런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Psalm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보고 계십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그 순결함을 찾으려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모두 함께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나눔을 위한 질문 오늘 나눔은 위에 파란색으로 표시한 질문들을 포함해 설교와 관련된 자유 주제로 허심탄회하게 나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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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 50:15-21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를 보존하시고,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시며, 만물을 정한 목적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손수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를 믿는 믿음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과 개인에게 일어난 일을 영적 시각으로 느끼고 해석할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연법칙이나 우연으로 해석하겠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성도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A.W. Tozer)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두 가지 (섭리 혹은 우연) 다 해석이 가능하기에,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지는 결국 믿음과 선택의 영역에 속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증명하시거나 설득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주신 영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고, 깨달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점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만 투영하시는 분이 아니라, 비록 죄 많고 부족한 피조물이라도 그들의 뜻과 결정을 존중해 주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섭리의 3요소 (보존, 통치, 협력)에서도 잘 알 수 있는데, ‘보존’은 하나님이 만물을 보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며 (히 1:3), ‘통치’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하신 존재 목적에 맞게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33:11-14) 가장 중요한 ‘협력’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의 생각과 의지와 협력하여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잠 19:21)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아, 다른 형제들이 받지 못한 색동옷을 받은 특별한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순진한 요셉은 이를 형들에게 자랑하여 가뜩이나 질투심에 가득 찬 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이집트의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요셉은 옥에서 만난 술관원의 꿈을 해석해 준 일이 계기가 되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일약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에서 보여준 대로 다가올 흉년을 대비함으로써 이집트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많은 사람들, 게다가 자기 가족의 목숨을 구하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섭리의 라틴어는 provideo인데, 이는 ‘미리 알고 대책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하신 일이 바로 ‘섭리’ 인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을 매정하게 이집트로 팔아 넘긴 형들과의 관계였습니다. 이 일은 요셉이 겪은 그 어떤 일보다 더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요셉의 깊은 상처와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19-21절을 보면 요셉은 자신의 비극적 상처를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에게 형들의 악한 계획을 허용하셨는지 요셉은 이미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보존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켜졌으며, 형제간의 화평이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이 섭리의 결과입니다. 또한, 요셉 자신에게도 아픈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이 재해석되면 상처는 치유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조차 심판자의 자리에 서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를 끼친 사람과도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롬 8:28)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섭리 신앙’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내 삶을 확실하게 이끄시고 책임지고 계심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어지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시 84:11, 렘 32:28) 둘째, ‘역경 속에서 인내’ 할 수 있게 됩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을 신뢰하며 우리는 소망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시 39:9) 슬픔 속에서 고요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골 1:11) 셋째, ‘기도의 용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협력’적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때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고, 기도를 명령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에 참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지의 미래를 향한 소망의 빛’을 밝혀 줍니다. 특히 청년의 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에 대한 선하신 뜻과 계획을 다 갖고 계십니다. 이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선하게 풀어가실 것입니다. 그것을 다 이루실 때까지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드리는 삶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붙잡고, 영안으로 세상으로 바라볼 줄 알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는 복된 인생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1. 오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그동안 오해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은 쓰지만, 섭리의 결과는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경험담을 함께 나눠보세요. 설교에서 제시한 섭리의 유익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면 함께 나눠보세요.
청년부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샬롬! 삼상 15장은 사울 왕의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왕이 된 사울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하나님의 뜻 대신 자기 뜻대로 행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그의 왕조(왕권)이 무너집니다. 삼상 15장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결정적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대적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멸(헤렘)이란 완전히 멸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지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습니다. 그는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고 가축 중 좋은 것들을 남겨둡니다. 완전한 진멸을 실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 왕의 불순종이고,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결정적인 사건(계기)가 됩니다. 사울 왕의 불순종을 통해, 우리는 ‘불순종의 3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입니다(10-15절). 둘째, 죄를 변명(합리화)하는 것은 불순종입니다(16-21절). 셋째, 자기를 높이는 것은 불순종입니다(22-31절). 그러면 사울 왕의 불순종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의 상실입니다. 사울은 본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9:21). 하나님은 겸손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17절). 그러나 겸손을 잃게되자,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었고 결국 그의 왕조(왕권)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과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참 왕(우리의 참 왕)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지만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예수님에게 주시고,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세상을 아름답게 회복하셨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왕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겸손함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펼쳐가는 AKPC 청년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Amen!
응답 찬양 – 섬김 & 십자가를 질 수 있나(후렴)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낮은 이 곳에 내려오신 주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얼마나 큰지 우리가 높아지면 그가 낮추시리 우리가 낮아지면 그가 높이시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으로 나 자신을 낮추는 섬김으로 내 발을 닦아주사 먼저 섬기시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었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으로 나 자신을 드리는 섬김의 모습이 되기를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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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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