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현대 기독교인과 성막 (민 9:15~23)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굉장히 독특한 관계를 형성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의 선한 왕이 되셔서 그들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친히 그들 가운데 사시며, 인도해 가십니다. 오늘 주제인 “성막”은 이러한 하나님과 주의 백성의 관계가 함축된 장소였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막 중심의 삶’이 오늘을 사는 크리스쳔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겠습니다. 그럼, 먼저 과거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성막이 어떤 의미였는지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성막의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입니다. (출 25:8)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작고 초라한 성막에 친히 사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에게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친히 성막에 거하시니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출 40:34-35)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시자 그 성막에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이 가득 찼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그 영광에 압도되어 죽고 맙니다. (예, 웃사)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회막 대형 사진) 하나님이 성막에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막의 계보를 잇습니다. (마 16:18-19, 고전 3:16) 성막에는 성부 하나님이 친히 거주하셨다면, 교회는 성자 하나님이 그 머리가 되시고, 성령 하나님이 항상 내주하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에는 성막과 동일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거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갔듯이,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교회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교회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살아가시나요? 삶의 거처를 정하실 때, 교회 공동체를 고려하여 정하는 것, 새 지역으로 이주하실 때 좋은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교회 중심의 삶의 중요한 실천 덕목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교회공동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막의 두번째 의미는,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핵심 장소였습니다. (민 9:17, 22-23)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이 구름기둥에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름기둥이 사막의 낮의 뜨거운 햇빛과 밤의 추위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성막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21세기에는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름기둥의 두번째 기능은 “인도하심”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을 보고 가고 서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들을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거나, 새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 등등 중요한 인생의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교회를 통해 결정하는 태도는 복된 태도이자 성경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인도함 받으실 때 꼭 기억할 것은, 기다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이 떠오르지 않으면 1년이든 2년이든 그 자리에서 그냥 머물렀습니다. 만약, 우리 삶에 구름기둥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대로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잘 받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막의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모임의 장소였습니다. (출 33:7) 성막을 회막이라고도 불렀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찾을 일이 생기면 회막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 있는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주의 말씀을 대변하였고, 아론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헌신을 약속하거나, 회개하거나, 감사하고자 할 때, 제사를 드려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회막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이러한 회막의 역할은 오늘날 교회의 예배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배 때 또한 성직자를 통해서 주의 말씀이 선포되고,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죄를 회개하고,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예배가운데 우리를 다시금 영적으로 충만케 채우십니다. 따라서, 성막 중심의 삶이란, 오늘 날로 보면 “예배 중심의 삶”입니다. 또한, 회막은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에서 모여서 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때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을 징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기능도 교회가 물려받았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식구들이 함께 예수님을 따라 살도록 격려하고, 권면하는 곳입니다. 만약, 우리 중에 성경적 가르침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의 마음으로 그 분을 권면하는 것도 중요한 교회의 기능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삶을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맑은 날만 있지 않습니다. 흐린 날도 많습니다. 그런데, 좋은 공동체 가운데 계신 분은 회복하는 시간이 빠릅니다. 주변에서 기도해주고, 걱정해주고, 또, 본인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영향력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회복됩니다. 여러분, 공동체를 사랑하십시요. 그것이 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 중심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깨닫고, 삶의 중심을 교회로 맞추는 복된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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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예수의 실체를 받아들이십시요! (눅 8:26~39, 봉독 26~33)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관해 하나님의 귀한 지혜를 함께 배워가기를 소망합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이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거라사라는 이방인 마을로 가십니다.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다소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 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 자는 옷도 입지 않은 채(27), 무덤에서 산 지 오래 되었고(27), 수시로 귀신에게 붙들렸으며(29), 쇠사슬에 묶여도 끊고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습니다. (29) 사실, 살아는 있으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 있는 처참한 모습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그의 영혼을 붙잡는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이 군대귀신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귀신들린 자가 먼저 와서 예수께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소리칩니다.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악한 영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권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지껏,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던, 심지어 쇠사들도 묶을 수 없었던 그가 스스로 예수의 권세 앞에 무릎 꿇은 것입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풍랑도 예수님 앞에서 잔잔해진 것처럼, 군대귀신도 예수님 앞에서 잠잠해진 것입니다. 그의 이름 “군대”의 원어는 legion (레기온, 리젼)으로 로마군의 제대 이름입니다. (약 6천명) 군대귀신은 집단으로 함께 다니는 악한 영인데, 성경은 이런 집단적인 영적 존재가 있음을 말합니다. (눅 11:26) 당시, 이 지역은 모두 로마군 (레기온)의 통치를 받던 곳이었습니다. 로마 통치군이 주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찬탈한 것처럼 군대귀신도 이 사람에게 들어와 그를 통치하고 그 삶을 송두리째 찬탈해 갔습니다. 예수께서 군대귀신을 쫓아내시자, 군대귀신은 지옥대신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그들이 돼지떼에 들어갔고, 그러자 돼지떼가 비탈길로 막 뛰어가 모두 호수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난해구절) 이 말씀에서의 핵심 포인트는 ‘영혼 구원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돼지 떼의 죽음은 물론 큰 희생이지만,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한 영혼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눅 15장, 찰스 스펄전) 이 사건 이후,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사람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대조적입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인격적 회복”을 경험하고,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자원합니다. 군대귀신이 들었던 자가 예수의 증인이 된 놀라운 반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반면, 마을사람들은, 귀신들렸던 자가 어떻게 나았는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가득 차” 예수께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인적 권능과 권위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증인과 예수의 관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님을 누구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체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심지어 악한 영들조차 따르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이십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마을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아는 상식적인 세상의 모습이 아닌 것이 싫었습니다. 만약에 생길 지 모르는 추가적 희생이 걱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익숙한 일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떠나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우리도 단지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예수를 단지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시고, 좋은 분이신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분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합니다. 예수를 단지 아는 사람들은 교회다니는 것이 내 생활에 도움이 될 때는 좋아하지만, 내 삶에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올인하셨습니다. 제자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가치관을 초월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면, 삶이 변하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안 변하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려면, 나를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거라사에 일부러 찾아 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 (요 6:39) 예수님은 2천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를 구함으로써, 이 자가 얼마나 귀한 자인지 스스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한없이 비천하게 본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그녀가 존귀한 하나님의 예배자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그들은 바로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 우리의 영적 모습은, 살아 있으나 사망권세에 얽매였던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친히 감수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예수의 증인으로 살려고 합니까? 아님, 마을사람처럼 살려고 합니까? 예수의 십자가와 예수의 은혜를 머리로 받지 말고 가슴으로 받읍시다. 그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한 통치자로 받아들입시다. 그 분의 은혜를 피부로 체감하고 잊지 맙시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의 증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귀신 들렸던 자가 그랬던 것처럼…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말씀 :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 (신 6:1-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인 여호와이시다. 너는 네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라.” (4-5)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과정이 마무리되고 다음 과정으로 들어서는 때를 계속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변화를 준비하는 것이 옳은 지 신명기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세 편의 설교를 종합한 책입니다. 첫 설교는 1장에서 4장 43절까지이며, 두 번째 설교는 4장 44절에서 26장까지이고, 마지막 설교가 27장에서 마지막 34장까지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 설교가 시간적 스펙트럼을 갖고 구성되어 있는데, 즉, 첫 설교는 과거, 두 번째 설교는 현재, 세 번째 설교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선 과거의 측면에서 볼 때, 삶의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는 지나온 길을 회고해야 함을 모세는 강조합니다. (신 29:5-6) 척박한 광야에서 40년간 생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지키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전환기에 큰 힘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손길은 현재보다는 과거를 회상할 때 더더욱 확실히 느껴집니다. 이를 잘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도 지켜주신 이가 미래에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신 1:30) 과거에 대한 두 번째 권면은, 지난 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예, 가데스 바네아 사건) 인생의 전환기에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되새기며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마음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마다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쉽게 넘어집니다. 문제는, 이런 죄악된 본성들이 새 땅에 들어가서 주님 은혜로 살만 해지면 또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마음에 되새기는 것은 인생의 전환기에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현재와 관련된 첫 번째 메시지는 ‘우리 시각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두라’ 입니다. 인생의 전환기에는 우리의 관심을 빼앗는 것들이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새 환경 적응, 새 직무 적응, 보금자리 마련, 새 공부 시작 등)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많은 시간과 관심을 요구하는데, 자칫 이 과정에서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더 집중하게 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 의미의 우상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인생의 전환기에 이러한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우리 시선을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신명기는 이와 관련해, 예배와 봉헌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배: 12장-16장, 봉헌: 26장) 예배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정체성과 관계가 정립되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성공하는 신앙생활의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예배의 성공의 시작은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예배의 성공은 예배자의 마음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 꼭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가겠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강조한 것이 봉헌, 즉 헌금 생활입니다. 새로운 길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곳에서 베푸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지의 첫 소산물과 십일조를 요구하셨습니다. (신 26:10, 12) 십일조와 주일 헌금생활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감사의 표현이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것 일부를 하나님께 돌려 드릴 때, 나의 필요를 아시는 주께서 신실하게 채우실 것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십일조는 주의 자녀가 하나님께 복 받는 놀라운 비결입니다. (말 3:10)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 이런 결단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제게 새 직장을, 새 환경을 열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그 곳에서 수확한 월급의 십일조와 첫 열매를 주님께 기쁨으로 드리겠습니다.” 새로운 길에 들어설 때 미래에 대한 첫 번째 메시지는, ‘새 길에는 축복의 가능성도, 저주의 가능성도 함께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 축복과 저주 말씀 공존 – 신명기 28장) 이는 주께서 인도해 주신 길이라도 축복과 성공이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전환기에서 어느 길로 갈 지 분별하는 노력만큼, 그 길에서 순종할 수 있도록 마음의 다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와 관련한 두 번째 지혜는, ‘비록 실패할 지라도 주님이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심을 믿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우상을 섬기고 타락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신 31:16) 그래서 모세에게 노래를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부르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그들이 재앙을 받을 때 그것이 그들의 불순종 때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증거가 필요하실까요? 그것은 비록 그들이 불순종하여 징계를 받더라도 다시금 주께로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불순종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누구도 주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신 32:39)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하심과 신실하심입니다. 이 점 기억하고 우리는 비록 징계를 받을 때라도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돌이키는 자를 우리 하나님은 결코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이 모든 시간의 스펙트럼을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는 단연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때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자 말씀이 주는 지혜입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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