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메시아를 기다림
본문: 미 5:2-5 성경의 예언(Prophecy)이란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God reveals Godself)’ 입니다. 예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제한성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담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죄성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어둡게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를 보여 주셔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가서는 유다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BC 742-687) 선지자 미가를 통해 예언된 예언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매우 위험한 상황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은 이들의 죄를 징계하시기로 이미 결심하신 상태였습니다. 이 때 주신 예언의 말씀이 놀랍게도 임박한 징계의 예언보다, 그 후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놀랍습니다. 이처럼 예언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회복의 중심에 바로 메시아가 있습니다. 미가서는 먼저 메시아가 다윗의 씨앗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합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오는 것은 ‘겸손’과 ‘새 시작’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 비할 수 없이 작고 별볼일 없는 도시입니다. 성경은 믿음도 소망도 아주 작은 겨자씨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베들레헴은 겉으론 허름하지만 그 뜻은 ‘풍성함’이 있습니다. 이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패한 예루살렘과 반대되는 이미지입니다. 바로 이 곳에서 ‘새 시작’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인 것입니다. 미가서는 메시아의 기원이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2). 이는 명백하게 성육신한 예수에 대한 예언입니다. 두 번째 메시아 예언은 ‘해산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해산의 고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결과로 하와가 받게 된 징벌이었습니다. 죄값은 아니지만 (cf. 죄값은 사망),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 상징, 즉 징벌적 표징이 산통입니다. 이는 메시아의 오심이 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메시아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미 4:10). 다음으로, 미가서는 메시아가 오면 ‘연합과 회복이 일어날 것’을 예언합니다. 연합은 두 단계로 이뤄지는데, 먼저는 남은 자들 (흩어진 자들)이 돌아오는 것이고, 그 후로는 온 열방이 몰려와 연합하는 것입니다(미 5:3, 4:1). 메시아가 이룰 연합은 이 같은 우주적 연합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메시아의 회복사역은 먼저, 자기 양 떼를 먹이시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꼴을 먹여주심을 의미합니다. 즉, 회복은 주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을 먹여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이어서, 메시아는 자기 양 떼를 보호하십니다. 즉, 악한 자들을 쫓아내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면 고통받던 양 떼들은 평안과 안락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미 4:4). 이처럼 회복은 주께서 우리의 목자요, 대장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 2:13). 그 다음으로 메시아는 양 떼의 주권을 다시 세우십니다. 그들을 열방 위에 우뚝 서게 만드십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교회). 그러나, 메시아가 세우실 주권을 세상 주권으로 오해하면 가롯유다와 같이 메시아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세우시는 왕권은 세상의 왕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입니다. 원래 왕권은 하나님 왕권만 존재하였습니다. 초림(The First Coming) 메시아는 이것을 회복시키시고, 재림(The Second Coming) 메시아는 세상 왕권을 그 발 아래 굴복시키심으로 하나님 왕권을 이 땅 가운데 완성하실 것입니다. 메시아가 이룰 회복의 완성은 온 피조세계의 질서와 평화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단순히 인간세계 뿐 아니라 모든 창조세계의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미 1:2). 그러나 메시아의 회복 사역이 완성되면 온 피조세계가 회복될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맞도록 질서가 세워질 것입니다 (미 4:1).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의 예언은 한 가지도 떨어짐 없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완료 시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예언은 이미 “완료(done)” 되었고, 어떤 것은 “완료진행(Already, not yet)” 중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 예언은 이미 멸망이 정해진 소망없고 답답한 현실 속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궁극적인 회복 계획을 소망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예언은 임박한 징계를 참음으로, 또한 죄를 참회함으로 얻게 될 정결함과 거룩함에 대한 동기와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미가서는 죄인인 이스라엘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계획(열방 구원의 중심)을 다시 붙잡을 수 있는 믿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적 침체와 삶의 우선순위로 영혼에 동맥경화가 걸리진 않으셨나요? 반복해서 짓는 죄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거룩함에 대한 소망을 잃은 지 오래 되셨나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를 향한 위대한 약속들은 도무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만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도 메시아가 절실히 필요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답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답을 찾기 원하십니까? 이 답을 찾기 원하시는 모든 분들을 이번 수련회에 정식적으로 초청합니다. 그 곳에서 메시아의 가장 위대한 십자가 사역을 나눌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분들과 우리 공동체에게 회복과 부흥의 거대한 물결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나눔 질문 1. 당신은 메시아가 필요합니까?
0 Comments
![]()
제목: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II
본문말씀: 고전 3:1-3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의 특징 네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 내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사람,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는 사람,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영적인 사람의 특징들을 살펴보는데,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적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우선, 섬기는 리더십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섬김의 리더십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준 사건 (세족식)은 예수님의 섬김의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 일은 당시 기준으로나 현대의 기준으로나 모두 센세이셔널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이 하는 일인 발을 닦는 것을 선생이신 예수님을 보이신 것은 그 분이 진실로 섬기기 위해 오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진실로 섬기셨기에, 섬김을 받으실 때 섬기는 자의 마음도 잘 헤아리셨습니다. (예, 옥합을 깨뜨린 여인) 이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은, ‘서로 섬기라’ 입니다. 섬김이 어려운 이유는 섬김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섬김의 삶은 육신을 제어하고 말씀에 따라 살려 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사람은 원수까지 용서하는 사람 (혹은,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보이신 본 중 우리에게 가장 큰 도전을 주는 것이 ‘원수들을 용서하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자신을 못박은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니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두라고 말씀합니다 (마18장,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 비유) 용서는 용서받는 자를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우리 마음에 독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나를 죽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도 꼭 용서해야 합니다. 셋째, 영에 속한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화평을 유지하되, 모두를 기쁘게 하려 하지 않는’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는 잘 맞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사랑하시기에, 주의 자녀된 우리는 모든 사람과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화평의 관계가 깨지면, 내 마음의 화평도 깨어집니다. 이를 생각하면, 앞서 언급한 용서와 마찬가지로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결국 내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화평이 유지되는 것에 대단히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과 화평을 유지하라고 하나,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다보면 자칫 사람들에게 내가 휘둘릴 수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과 군중들에게 좌지우지되지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의 피할 수 없는 마찰을 감수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The True Master). 성경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 원리가 우리 속에 정립될 때, 우리는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단단한 영적 사람들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항상”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항상’ 신뢰한다는 점이 그리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떨 땐 하나님이 날 완전히 잊으신 것같이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죠. 예수님께는 십자가 지신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단 한번도 분리되신 적이 없으신 완전한 본체이신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는 죄인이 겪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생생하게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심은 예수님께도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넘기워졌을 때, 이미 예수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때에도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일어나는 일이다”라고 빌라도에게 대답하십니다 (요 19:11).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안개가 자욱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아름답기까지 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믿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 자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혼자 버려졌다고 느껴지시나요? 예수님의 고백을 들으십시요.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요 16:32).” 예수님조차 이 고백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으실 때 하셨음을 기억하십시요. 성경의 놀라운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예수믿고 주의 자녀가 되면, 그 때부턴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아무런 조건도 요구치 않으시는 그 무조건적 사랑이, 그 선하심이 우리 삶을 관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1. 나는 섬김을 잘 감당하나요? 나의 섬김에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모습은 혹시 없나요? 2.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으신가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허심탄회하게 나눠보세요. 3. 사람들과 화평을 유지하는 것과,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 균형감각은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요? 4. 하나님이 날 버리신 것과 같은 때 하나님을 붙잡으신 경험이 있으시면 나눠보세요. ![]()
제목: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I
본문말씀: 고전 3:1-3 우리 모두는 성숙해지길 원합니다.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감성적으로, 영적으로 더욱 성숙한 존재들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숙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통해 조금씩 거두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오늘은 고린도전서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에 대해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여러가지로 미성숙한 모습들을 보인 이유를, 바울은 그들이 아직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3). 그는 육에 속한 사람은 사람의 악한 본성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이와 반대로,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따르는 사람이며 (2:12),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 (2:16)이라고 그는 정의합니다. 먼저, 고린도 교회를 통해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우선, 무리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3:4). 다음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2:14). 즉, 영적인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 11:3). 마지막으로, 거룩이 무너진 모습입니다 (5:1). 육은 정욕을 따르는 본성이 있습니다. 거룩 (구별됨)은 육체의 본성을 제어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1서의 ‘세상의 3대 죄성’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시기와 다툼은 ‘이생의 자랑’ 때문이요,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안목의 정욕’ 때문이요, 거룩이 무너진 삶을 사는 것은 ‘육신의 정욕’ 때문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에 속한 사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첫째,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정체성). 얼마전 타개하신 세계적인 변증가 Rabi Zacharias는, 적어도 세계적 종교라 하면 4가지의 핵심원리를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Origin, Destiny, Meaning of Life, Morality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중 앞의 두 가지, 즉,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굉장히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다. 그는 주로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I am” 시리즈를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 지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요 6:35, 8:12, 10:11, 11:25, 14:6, 15:1) 자동차 설계자가 자동차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말할 수 있듯, 우리를 창조하신 분만이 우리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창세 이전에 이미 택함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엡 1:4). 하나님께로 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성전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이 값을 치르고 사신 존재들입니다 (롬 8:16, 고전 3:16, 벧전 2:9, 고전 7:23) 이러한 정체성만 정확히 기억하고, 뿌리내린다면 신앙 생활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정도로 정체성 확립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둘째, 내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양무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0:10). 그것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도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요 12:27). 예수님처럼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낸 사람은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The purpose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이다. 성경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합니다. (전 12:13, 미 6:8) 이 신앙고백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된다면 우리 삶의 모습과 방향은 굉장히 많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업을 구하는 기준도, 일상의 모습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시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셋째, 영에 속한 사람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입니다. 삶의 큰 목적을 하나님께 맞추어도 일상에서의 작은 결정들은 여전히 내 뜻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갈등하며 선택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삶의 본을 가장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 심지어 말씀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의 순종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비록 고통스럽고 큰 희생이 따를 때조차 그 뜻을 따르셨기 때문입니다 (막 14:36). 우리가 순종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수 차례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바쁜 사역 중에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수시로 기도하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었고, 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 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일의 내용뿐 아니라, 일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시며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셨지만,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철저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사역하셨습니다 (요 5:19). 단 한 번도 예수님의 권능을 임의로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조차 이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더욱 철저히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힘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일관된 원리는, 사람의 약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강한줄 아는 자들을 겸손케 하시고,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전 1:27-29).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힘으로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영에 속한 사람은 그 삶의 중심이 하나님으로만 꽉 채워진 사람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Of the Father, By the Father, For the Father”인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 한 걸음씩 성숙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
"주일설교에 대한 질문을 작성해주세요."
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1층 본당) Archives
March 2025
Categor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