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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믿음 (히 11:1-12:3)
신앙에 있어서 믿음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 좋다’는 말과 ‘신앙 좋다’는 말을 혼용해서 사용할 정도로 믿음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렇듯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고, 그 분이 일하시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큽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히11:1)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미래에 관한 것이요,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지금은 없고, 안보이는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임을 배웁니다. 믿음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소망보다 더 강력한 소망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로부터 계승 받았습니다. (히 11:2) 이 믿음은 나로부터 다음 세대로 계승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히 11:6) 우리가 믿음으로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영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노아, 모세, 다윗 등)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이는 우리 세계관의 정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는 우리 정체성의 정립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의 모든 선택의 영역, 즉, 진학, 취업, 결혼, 자녀양육, 재물, 매일 매일의 결정들에서 믿음의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믿는 것입니다. (노아 이야기)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을 때 어떻게 믿음의 시도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믿음의 시도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도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 어느덧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집니다. 언젠가 준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인생 최대의 믿음의 시험을 하실 것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돈 것, 등) 그것을 이긴 자는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이길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2장은 먼저 인내함으로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히 12:1) 인내는 어렵지만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에 대한 증거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를 바라봄으로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히 12:2) 이는 예수님이 부활의 기쁨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쁨과 영광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가장 고상하고 깊이 있는 축복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믿음의 경주는 그 상급이 하늘나라에서 맺힌다는 사실입니다. (히 11:39-40) 믿음의 열매가 비록 이 땅에서 맺히지 않을 지라도 그 믿음의 경주가 더욱 값진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암 환자 이야기) 이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 본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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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21세기에서 본 창조 (창 1-2장)
현대를 사는 크리스챤들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이렇게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현대 과학이 틀렸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이야기를 믿음의 영역으로만 한정해서 믿음의 눈으로만 창조이야기를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과학적 발견을 수용하면서 창조이야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더 넓혀가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워도 21세기를 사는 크리스챤은 이 세번째의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와 과학은 같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면 과학의 연구대상인 물질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롬1:20) 신앙과 이성, 창조와 과학의 통합적 접근법은 역사적으로 오래되고 정통성이 있으며 가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주신 이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과학과 세상을 아우르는 신앙관 정립에 도움을 주고, 좀 더 너그럽고 수용적인 자세를 갖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며, 특히, 세상의 기원과 종말, 인간의 상태와 구원의 길을 제시한 계시의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에서 기인된 상징과 계시와 은유적 표현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선언입니다. 이는 설명문도, 역사서도, 과학서도 아닙니다. 이 장르적 특성을 잘 이해해야 이 글이 쓰여진 목적에 맞게 잘 읽을 수 있습니다. (빅뱅과 창조이야기) 빅뱅이론은 1927년 벨기에 조르주 르메트르 라는 분이 최초로 주창한 이론인데, 별들의 간격이 멀어지는 것을 통해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역으로 올라가면 어느 순간에는 우주가 골프공보다도 작은 한 점이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팽창속도, 우주나이, 지구나이) 반면, 신학계에는 성경인물의 가계도를 연구하여 지구나이를 계산해 왔습니다. (대략 6천년) 이 방법에는 여러가지 오류가 있어서 지금도 우리가 이를 주장하는 것이 타당한 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교계는 대부분 진화론에 대해 반대하여 왔습니다. (창 1:21) 이미, 종교는 과학에게 유사한 오류를 저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동설, 지동설 이슈가 그것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지동설을 인정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는 것,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진화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우리 후세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반면, 과학에도 분명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먼저, 과학은 물질세계의 증거에 입각한 증거들만 인정합니다. 따라서, 무에서 유로 무언가가 창조된다는 것은 과학적인 접근방식이 아닙니다. 빅뱅도 초기 우주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학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있었는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 초기우주 물질이 왜 갑자기 뻥하고 터졌는지를 과학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과학은 빅뱅이전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우리 이성은 빅뱅 이전에도 분명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합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무신론이 유신론보다 더 비과학적이라고 말합니다. (단순 방정식, 상수 이야기) 창 1:1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21세기적 해석) 성경에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 1:1-2:3은 선언적, 공식적, 권위적이며, 하나님이 6일 동안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7일째 쉬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P) 창 2:4-2:25은 하나님과 인간이 친밀한 관계로 그려진 스토리 텔링 식의 이야기입니다. (J) 따라서, 창조에서 중요한 건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는 것이 창조의 목적인 점과, 우리의 영과 육은 안식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이야기 다 창조의 핵심은 인간의 창조입니다. 인간의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영적 존재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모든 자연세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권한을 위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을 여전히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가릴 수 없는 증거입니다. 무엇이 인간을 로봇으로부터 구별하나요? 그것은 하나님이 불어주신 영과 혼입니다. (창 2:7) 인간 창조 이야기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절절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21세기에도 변치 않는 진실입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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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소망, 두려움과 죄의식과 수치심을 넘어 (시 34:18)
새 해를 맞이하여 소망에 관한 말씀 묵상을 통해 주님 주시는 귀한 소망이 우리 모두에게 샘솟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크리스챤인 우리가 주님의 소망을 갖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잘못된 생각과 마음들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 첫번째 마음은 ‘두려움’입니다. 다수의 심리학자들은 두려움이 학습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자라면서 직접 경험을 통해서 두려움을 배워갑니다. 혹은, 간접적 학습으로도 두려움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두려움은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 생깁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또한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연구결과를 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염려 중에 정작 진짜 필요한 문제는 불과 8%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안 해도 되는 염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불필요한 근심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마 6:7, 벧전 5:7) 이보다 심각한 것이 영적 두려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과도하게 두려워하는 마음’ 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느껴지십니까?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과도하게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으면, 그 사람은 아버지의 크신 사랑 안에 깊이 들어가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이런 분들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신 성육신 사건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치지, 무서워 벌벌 떨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렘 29:11, 딤후 1:7) 두번째 극복해야 하는 마음은 죄의식입니다. 이는 이미 전심으로 죄를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죄의 영향력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무서운 재판관’ 하나님의 이미지와도 깊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민감한 것은 중요하지만, 죄의식에 눌려 사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정결케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죄사함 받은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시 103:12, 히 10:17-18, 사 43:25) 마지막으로 극복해야 하는 마음은 수치심입니다. 수치심은 죄의식이 굳어져서 내 존재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무너진 것을 말합니다. 수치심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의 정체성까지 뒤흔드는 굉장히 심각한 영적 도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기여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지금 나의 행동과 나의 영적 상태와 관계없이 영원히 변치 않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이 믿음이 우리에게 큰 영적 안정감과 평안함을 줍니다. 육신의 부모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아버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분이 우리를 귀하게 보시는데, 우리가 그 분을 두려워하고, 무서워 벌벌 떨고, 그 분 앞에만 가면 자꾸 작아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내 마음을 좀 제대로 알렴. 나는 너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한단다. 내게 오렴. 내가 너를 안아주고, 너를 품어주마. 그리고, 너에게 참 소망을 부어 주겠다. 그 소망을 갖고, 힘차게 삶을 살아가렴.”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알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소망을 받아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 되길 축복합니다. 나눔과 묵상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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