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하나님의 자기 계시 (출 3:1-8)
모세가 호렙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부름을 받는 장면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특이하고 생각할 것이 많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지,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해 주는 귀한 근거의 말씀이 됩니다. 이 장면의 첫번째 특이한 점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다는 점입니다. 보통은 천사나 하나님의 영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때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모세에게 적극적으로 계시하십니다. 한 번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본 적 없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모세가 익숙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입니다.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 (야훼),”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금 깨닫게 하십니다. 이미 알고 있는 속성이라도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선포하실 때 우리는 큰 감동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세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본문말씀에서는 이집트의 압제 가운데 고통받는 백성들을 돌아보셨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계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나면, 그동안 왜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모세는 이제 왜 자신이 40년간이나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살았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를 두고 계획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인생의 어느 부분도 버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실패도, 쓰라린 경험도, 잊고 싶은 흑역사도 하나님은 다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출애굽 사명을 모세가 맡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시금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신 후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에 대한 모세의 반응이 굉장히 특이합니다. 보통, 성경의 다른 인물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으면, 그 은혜를 깨닫고 순종하였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 밀 타작틀의 기드온 등) 그런데, 모세는 끝까지 이 사명을 끝까지 거부합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부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이 사명의 근거임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보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둘째,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반문합니다. 그는 자기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집트 바로에게 하나님을 누구라고 소개해야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사명의 시작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 (야훼)임을 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이름의 숨겨진 뜻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 시작과 끝이 없는 분, 모든 만물의 근원이자 홀로이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그 분께 우리 시선을 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이 가능하지 않다고 반문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가 우려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지를 구체적으로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오래 참으시는 성품이 잘 드러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확증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전히 주저하였습니다. 왜냐면 그는 ‘사명의 무게감’과 ‘자신의 연약함’에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자기 자신이 완전히 새까맣게 타버릴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의 두려움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미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타지 않는 떨기나무’ 속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너무 크고 부담되어 마치 모세를 완전히 새까맣게 태울 것 같지만, 사실 모세는 떨기나무와 같이 불에 타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은 하나님이 직접 하십니다. 사명자는 그저 떨기나무처럼 자신을 불태울 수 있도록 내어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나, 그 불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태우는 정결케 하는 불이십니다. 오히려 이 불이 우리를 정결케 하면, 이사야 선지자처럼 우리는 “제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반응하게 됩니다. 지금 내 인생길이 마치 불 가운데로 가는 것 같은 분 계신가요?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역이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느껴지시나요? 그래서 마치 나는 새까맣게 타버릴 것만 같으신가요? 떨기나무 가운데 만나주신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그 불은 우리를 태우는 불이 아니라 정결케 하는 불입니다. 여호와란 이름을 기억합시다. 그 분은 모든 존재의 근원되십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 분이 직접 일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계획하신 놀라운 일들을 그의 섭리 가운데 이루시고, 우리는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여, 주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공동체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0 Comments
말씀 :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고전 15:19~26)
주님 부활하신 기쁨의 부활절입니다. 함께 이렇게 인사합시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이 하신 가장 큰 두 사역이요,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죽음, 대속과 같은 어두운 이미지라면, 부활은 승리, 환희와 같은 밝은 이미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이 십자가를 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신앙에서 항상 함께 묵상해야 하는 두 가지 큰 테마입니다. 부활이 빠진 십자가는 결론 없는 스토리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의 문제의 해결되었지만, 완전한 화해와 회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방식으로 인류회복의 역사를 끝내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이 함께 가야 합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증인으로 살수 있었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들은 다 흩어졌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의 교회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서 부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 “부활”이 내포한 영적 의미를 함께 살펴봅시다. 우선, 부활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를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부활하게 될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신앙의 최종 단계가 “소망”이 되어야 함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목적은 죄사함 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간단계일 뿐입니다. 그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어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지상에서 누리고, 또한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는 것이 신앙의 최종 모습입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은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이 곳과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영생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개인적 측면) 부활신앙이 완전히 내면화 된 신앙인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신앙인’입니다. (히 11:38) 또한,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세계관적 측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온 세상을 덮고,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다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적 종말론은 선의 회복만이 아니라, 악의 영원한 징벌도 함께 약속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그냥 두시나요?” 라는 질문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세상의 악을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종말 때 하나님은 겸손과 순종의 왕이신 주님을 통해 악을 영원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 과도기 입니다. 그럼, 진정한 부활신앙을 갖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부활 소망을 깊이 내면화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땅의 삶이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만 모든 소망을 두고 살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Already, not yet’ 이라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내 안에서, 교회에서, 주의 백성을 통해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종말에 주님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지금의 삶이 애벌레의 삶이라 해도, 이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나비로 사는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기독교인 답게 정말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짜 부활신앙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사례) 우리는 현실의 각박한 삶 속에서 부활신앙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곳에서 어떻게 부활신앙으로 살아갈 지를 고민하고 실천해 내야 합니다. 이 갈등과 고민은 우리가 평생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 싸움은 이미 승리가 보장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 대장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주께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절의 참 의미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을 잘 키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말씀 : 주가 쓰시겠다 하라 (눅 19:28~40)
오늘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실 때 많은 군중들의 환영을 받았던 날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즉 대추야자 가지를 들고 나와 환영하며 흔들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과 예루살렘은 아주 특별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정결의식, 성전방문, 골고다, 새 예루살렘 등) 누가복음 19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세 번째 (마지막) 방문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5일 후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실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종려나무를 흔드는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기뻐하시지 만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려주일 입성을 이루신 것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실 메시지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첫째,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왕이심을 밝히 드러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종려주일 입성은 예수님이 왕이심을 군중 가운데 명백하게 들어내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로마의 개선식과 너무나 유사한 그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와 장군을 환영할 때 레드카펫을 깔고, 팡파르를 부르며,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지금 로마의 개선식을 염두하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은 로마황제가 이 땅의 왕이자 신이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히 드러낸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모든 event가 연출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주님께서 진정한 왕으로서 완전히 영광받으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의 겸손의 상징은 바로 “새끼 나귀” 입니다. 새끼 나귀는 예수님과 천국에 대해 많은 것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당시 말은 거의 군사용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나귀는 백성들이 항상 사용하는 가축이었습니다. 나귀는 위엄도 없고, 용맹스럽지도 않고, 볼품도 없고, 체력이나 달리기에 뛰어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항상 주인 곁에서 우직하게 무거운 짐을 묵묵히 짊어 나르는 충성스런 존재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리더십이 바로 이런 겸손의 리더십,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나귀에게도 조건이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여야만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만 온전하게 드린바 된 나귀’ 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를 섬기는 우리가 예수님께 마땅히 드릴 ‘독점적 헌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입니다. 또한, 새끼 나귀는 경험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능력과 경험 많은 내세울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어떤 면에서는 바보스러운 우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가 쓰시려고 하실 때 항상 사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의 “질그릇”) 이런 사람에 대해서 우리 주님도, “주가 쓰시겠다 하라” 고 온 천하에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그 사람에 대해서 ‘독점적 선택’을 하셨음을 잘 나타내시는 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인지요. 우리 주님이 우리에 대해서, “아무개는 내가 쓸거야. 너희는 건들지 마.” 라고 세상에 선포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종려주일 입성은 예수님을 찬양하고 헌신하는 것이 축복이요 특권임을 보여줍니다. 군중들을 꾸짖으라는 바리새인의 요구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이 가만히 있으면 저 돌들이라도 외칠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주님은 돌들을 들어서도 찬양받으실 것입니다. 이는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섬기는 일이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축복이요, 초청임을 나타냅니다. 우리에게 섬김과 사역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축복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나와 공동체와 세상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내가 충성하고 헌신하지 않으면, 그 축복의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충성”과 “헌신”은 부름받은 자들의 가장 으뜸되는 덕목입니다. 그래서, 이 나귀는 어떤 영광을 얻었습니까? 이 나귀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등에 모신 나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모든 사람들의 찬양과 경배를 함께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면, 예수님 때문에 우리도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또한, 이 나귀는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놀라운 영광도 얻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멋진 백마도 받지 못한 영광을 이 나귀는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질그릇과 나귀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축복의 자리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충성스러움과 헌신의 마음입니다. 이 말씀 기억하면서, 고난의 자리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에, 우리도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신 것을 닮아, 나귀와 질그릇과 같은 자들 충성스러운 자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
"주일설교에 대한 질문을 작성해주세요."
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September 2024
Categor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