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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자의 삶 – “죄와 싸우는 삶”
여러분은 ‘명화 테러’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보통 유럽에 기반을 둔 기후단체나 환경단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유럽의 많은 박물관에 전시된 명화에 페인트나 수프 등을 뿌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환경을 지키지 않으면 더 이상 이런 명화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일은 먼나라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보 1호 숭례문은 2008년에 채종기씨라는 방화범에 의해 완전히 불에 타 전소되었었습니다. 그의 범행동기는 자기 땅을 국가가 매입 보상하는 과정에 불만이 있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습니다. 숭례문 복원에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인력과 재원이 투입되었습니다. 복구기간 5년 3개월간 엄청난 예산과 자원을 투입하여 2013년이 되어서야 복원된 숭례문이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문화재청은 숭례문의 가치는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강조했는데, 여러분은 이에 동의하시는지요?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런 행동을 한 조상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명품, 창조세계를 죄로 망친 아담과 하와 말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창조세계는 하나님께서 6번이나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감탄하실 만큼 완벽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땅은 저주를 받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궁핍과 수고가 인류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아담이 사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그저 한 번 실수했다가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해 창조세계가 타락하고 사망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불가역적 (irreversible)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망쳐진 창조세계를 지워버리시고 다시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인 ‘복원’을 택하셨습니다. 이 복원과정에 핵심 역할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의 유전자 속에는 ‘죄성’이 뿌리깊게 박혀 그 모든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이 항상 악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창6:5). 성경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인류가 죄악에 빠졌음을 반복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성경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상실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롬1:28-32). 이처럼 전 인류는 죄에 빠졌는데, 문제는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죄값이 우리가 치를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에게 단 하나씩만 주어진 ‘생명’입니다 (롬3:23). 따라서, 모든 인류는 자신의 죄값을 치르고 나면 더 이상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원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지고 대신 죄값을 치른다는 것” 어찌 보면 참으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고, 심지어 자기 파괴적이기까지한 그 결정을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때문에 정하셨고, 예수님은 그 계획을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소망이 없는 인류에게 다시 살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한마디로 죄를 이기신 것,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죄의 문제는 사망과 생명이 결부된 문제이다 보니 성경에서는 항상 피가 튀기고, 치열한 전투적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죄의 본질은 사망이기에 항상 처절합니다. 죄사함은 그저 아름답고 고상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죄에 대해서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죄와 싸우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죄 문제 해결하려고 오신 분이시고, 죄 문제 해결하시려 죽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혹시, 죄에는 스스로 관대하고 죄사함의 은혜만 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Dallas Willard 교수는 이런 부류의 기독교인에게 ‘뱀파이어 크리스천’ 이란 다소 원색적인 표현까지 사용하며 경고하였습니다. 죄와 싸우지는 않고 보혈의 은혜만 찾는다는 뜻입니다. 죄사함 받은 후 다시 짓는 죄에 대해서 성경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짓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적이고 반복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연약하여 짓는 죄에 대해서는 용서와 권면을 하지만, 의도적이고 반복적인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죄사함이 없고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히10:26-27). 은혜가 내 책임을 면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변명이 언제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것이란 내가 자꾸만 넘어지는 죄를 과감히 끊어 내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유혹에 안넘어가면 이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이겨냈을 때만 맛볼 수 있는 엄청난 영적 기쁨과 만족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함’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도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의지를 사용해서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비록 그 결심이 오래가지 못하더라도, 며칠 내에 또 결심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죄와의 싸움을 포기해선 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 해야 할 첫 번째 순종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다시금 죄에 대한 경각심을 세우고, 죄와 싸우는 결단을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응원합니다. 나눔 질문 1. 어떤 교회는 죄와 회개의 메시지를 ‘억압’으로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회피합니다. 여러분은 죄와 회개의 메시지를 은혜와 사랑의 메시지만큼 소중히 여기시나요? 2. 예수님을 믿어 죄씻음을 받은 후에도 반복적으로 짓는 죄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은 어떠했나요? 3.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죄와 싸우겠다는 결단의 마음이나 용기가 생긴 부분이 있다면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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