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7)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돌리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여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하나님께서 포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킬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1절)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포로 후 돌아올 백성을 향해 처음으로 주시는 말씀은 그들의 정체성을 이야기해 주십니다. 지명하여 불렀다는 의미는 뭉퉁그려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콕 집어서 불러 내었고, 그래서 너의 소유권이 나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너희는 나의 자녀다, 내 백성이다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나요? 그것은 분명한 정체성이 삶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다시는 우상 숭배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중요한 것이 바로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통해 우리는 존재의 이유와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넘어지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바로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고, 결국은 믿음까지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과 감정을 총동원해 자신이 삶의 주인 된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콕 집어서 자신의 백성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콕 집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자 하나님께 지명 당해 그의 자녀 된, 소유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 나는 주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소유물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구원받은 자들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일어나고 그 통치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함께 할 것이다’는 약속입니다. 물가운데, 불가운데 있을 지라도 너희와 함께할 것을 말씀하십니다(2절). 물과 불이 의미하는 것은 고난, 어려움, 고통입니다. 예수 믿는 자로 살아가면서 좋은 일만 생기면 정말 좋겠죠?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이 일어납니다. 건강의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 등등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생각해 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로 그들은 모진 고통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또한 목숨도 아끼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습니다. 비단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는 자녀들을 향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고 불이 너를 사르지도 태우지도 못한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자녀들을 그냥 내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고 또한 그 고난과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둘째는 ‘사랑하신다’라는 약속입니다. 4절”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하나님은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들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그리고 그 누구 보다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랑을 직접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죄 가운데 있어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를 예수님의 희생과 보혈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 받은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보배롭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차별합니다. 외모, 학벌, 경력, 능력, 재능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차별 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내어 자신의 소유 삼아 주시고, 함께 하시고 사랑해 주시나요? 그 이유는 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 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지명하여 불러내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과 이유입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다 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아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기준에 서서 행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직장, 직업, 학업을 통해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충성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젊음이 있고 열정이 있습니다. 그 젊음과 열정을 통해 또한 주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14:8).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고 주어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청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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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성도간의 관계 (몬 1:1-25)
오늘 함께 봉독한 말씀은 바울의 네 편의 옥중서신 중의 하나인 빌레몬서입니다. 이 편지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 지역에서 두란노 서원을 만들어서 교육 사업을 하고 있을 때, 골로새 출신의 사업가이자 부호로서 명망이 높았던 빌레몬이 그 곳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공부합니다. 그 후, 빌레몬은 골로새에 돌아가서 골로새 교회를 세웁니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를 생각하면서 두 통의 편지를 쓰는데, 한 통은 교회에게 보내고 (골로새서), 다른 한 통은 빌레몬에게 개별적으로 보내는데 이것이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라는 빌레몬의 도망친 종 때문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친 후, 어찌하다보니 바울이 갇혀있는 로마에 오게 되었고, 그 곳에서 바울을 통해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됩니다. 또한 그는 바울의 충직한 심복이 됩니다. (10절) 이후, 바울은 오네시모를 통해서 그와 빌레몬의 관계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문제를 놓고 한참을 고민한 바울은 빌레몬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영적 스승이었기 때문에 권위를 갖고 빌레몬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사랑으로 간곡하게 그에게 부탁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노쇠함과 갇힌 상황까지 이야기하며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먼저, 바울은 빌레몬의 신실한 신앙과 성품에 의지해서 부탁을 합니다. (4-7절) 빌레몬은 신실한 교회 지도자이므로 자신의 부탁을 너그럽게 사랑으로 들어주길 바울은 바랬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였던 이유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12-13절)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과거의 문제를 털고 완전히 새 출발을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빌레몬에게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 오네시모의 종의 신분을 해방시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16-17절) 사실, 이 부탁은 단순히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두번째 부탁도 놀랍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진 빚을 자신이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18-19절) 이처럼 바울은 오네시모가 진정한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노예해방과 빚 청산이란 엄청난 부탁을 빌레몬에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드립니다. 비록 이 이야기가 아름다운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지만 단순한 관계의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성경에 포함되었을까요? 그것은 지금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해 주고 있는 모습이 정확하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행동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만약,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너무 지나치게 오네시모를 위한다고 느끼신 분들 계십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감싸 안으셔서 구원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구원 방법대로 오네시모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수없이 생각했고, 그 결론이 오늘 본문에서 그가 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공동체 가운데 성도간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교회 안에서 불편한 갈등 관계 때문에 고민합니다. 이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 가운데 어떻게 하셨을까?” 묻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진정으로 느끼고 감사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동일하게 사랑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바로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계획하였습니다. 그는 오네시모에게 자신의 행동이 큰 잘못임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도 이를 잘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직접 전달하였던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뉘우침과 사과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본 빌레몬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화해와 용서의 이야기 속에는 바울의 철저한 자기 희생적 사랑이 있습니다. 그 뒤에는 ‘죄인중에 괴수’인 바울을 사랑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가 성도님들 간의 관계 문제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길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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