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감격스런 재회
요 20:19-23 19 그날, 곧 그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을 두려워해 문들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렇게 말씀하신 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23 만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요,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부활 신앙이라고 부를 만큼 부활은 ‘창조’만큼이나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교회와 기독교 역사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 전체를 이해하는 근간이 됩니다. 그 의미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 처음 만난 요한복음 20장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기록합니다. 그녀는 이전에 일곱귀신 들렸던 갈릴리 지방 여인이었습니다. 일곱 귀신들린 삶은 아마도 죽음보다도 못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녀를 예수께서 고쳐 주셨고, 그 때부터 그녀는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여 예수님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랐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죽으시던 날 골고다 언덕에도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장사할 때도, 그녀는 예수님의 묘지를 확인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보다 잘 처리하고 싶어서 정성껏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고, 안식일이 끝난 다음날 새벽 미명에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들은 깜짝 놀랍니다. 무덤의 돌 문이 굴려져 있었고, 그 곳을 지키던 로마 군병들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조심스레 무덤 안쪽을 살펴보았는데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실을 지체 없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합니다. 두 제자도 무덤에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예수의 무덤이 빈 사실을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은 이들이 부활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다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 곳을 떠날 수 없어 울며 그 곳에 남았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두 천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순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후 그녀는 자신이 본 것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달합니다. 마리아의 말을 전해 들은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예수님 시신을 가져간 자들로 몰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내적으로는, 제자들은 여전히 며칠 전 일어난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혼란스러운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심적 상태가 ‘문들을 다 걸어 잠그고’ 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부활체의 모습으로 이들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부활 상징) 두려움과 실패감에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첫 마디는 “평강”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말씀하신 ‘샬롬’은 정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샬롬을 이야기하는 분이 직접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평안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평안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완성된 평안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우리에게 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자에게서 나오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이어서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못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요,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고민했던 부분을 예수께서 친히 확증해 준 것입니다. 비로서 제자들은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이 기쁨은 단순한 재회의 기쁨을 뛰어 넘어, 무너진 믿음과 삶이 회복되는 놀라운 기쁨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복잡한 문제들이 단순해지고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기쁨과 소망이 회복되고, 삶의 방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그 후에,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며 이들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항상 구원과 회복을 주신 이후에는 ‘소명’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는 우리의 소명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함도 있지만, 소명을 감당하는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소명과 주실 때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함께 주시는데, 성령과 권위입니다. 먼저, 주께서는 이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은 성령을 받으리라는 약속이었지만, 이제는 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시대에 사는 우리도 이처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이 임합니다. 이 권능이 있어야만 우리가 능히 주님 주신 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위를 주십니다. 23절 말씀은 그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하신 ‘사명’과 함께 연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세상에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천국열쇠’를 주십니다. (마16장) 사명자는 이 열쇠를 사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죄사함의 자리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권위를 주시는 진짜 이유입니다. 따라서, 소명을 받은 자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사죄의 복음으로 초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주께서 직접 맺어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럼,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의 소명지는 먼 미래, 먼 땅이 아니라, 바로 내가 속한 삶의 현장입니다. “오늘 내게 열려 있는 곳이 곧 나의 소명지입니다.” 즉, 내 선교지는 내 직장, 내 학교, 내 교회, 내 목장, 내 소그룹입니다. 사탄은 “나중에, 나중에”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성령의 권능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차이를 기억하십시요.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내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주님의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 가는 곳마다 예배를 세우고, 여러분 선 땅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주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귀한 청년들 모두가 부활의 능력을 발휘하는 진정한 제자들 되시길 진심을 담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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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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