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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산상수훈 3 -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시는가? (마 5:17-48)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분명 구약 율법을 계승하시면서 동시에 구약 율법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새 계명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6개의 구약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새 계명입니다. 기왕이면 더 쉬워졌으면 좋겠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기존 율법보다 지키기가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기존 율법이 단순히 행위만 요구했다면 (실제는 아님), 새 율법은 마음과 동기까지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또 형제에게 라가 (미련한 놈),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2) 그 속 뜻을 예수님께서는 형제 간에 진정으로 화해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설명하십니다. 인류의 첫 살인인 가인의 살인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두번째는 간음의 문제입니다. 그 근원은 우리 내면에 있는 음욕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만 품었다면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음욕은 우리의 은밀하고 뿌리 깊은 욕구여서 다스리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어떤 종교적, 법률적 요구보다 높은 수준의 정결함을 요구하십니다. 추가로, 죄 짓는 눈과 오른손을 잘라내는 것이 온전한 몸으로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죄에 대해서 강한 경계심을 가져야 함을 말씀합니다. 다음은 이혼에 관한 율법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내와 이혼하면 이혼 증서를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 24:1) 이는 이혼당하는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율법이지, 남자가 이혼증서만 주면 마음대로 이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오로지 율법의 문자적 의미에만 집중한 나머지, 이를 자신들 편한대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한계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합니다. 그 다음은 맹세에 관한 율법입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맹세를 어기지 말고, 특히 주께 한 맹세는 꼭 지키라’ 입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맹세가 난무하였습니다. 이는 그 사회가 신뢰가 약하고, 맹세가 깨질 가능성이 많은 사회임을 반증합니다. 맹세할 때 우리는 쉽게 과장하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 솔직하고, 투명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도 솔직하고 정직하게 나가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복수와 관련된 율법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과 구약에 함께 기록되었으며, 흔히 동해동형법 (해를 입힌 대로 똑같은 벌로써 상응한다)이라고 부릅니다. 이 법이 생긴 배경은 사람들이 과도하게 복수를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복수할 때 잘 절제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 대고, 속옷을 가져가면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라’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도 원수를 갚지 말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예, 레 19:18) 또한,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임을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시 3:7, 롬 12:19) 예수님은 사람들이 율법의 하나만 알던 것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제 정말 어려운 새 율법을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를 위해 예수님이 주신 힌트는 ‘하나님이 그러신 분’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45) 어느 목사님은 우리 진짜 원수는 사탄이지,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들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까지 지키기 어려운 새 율법을 주셨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진짜로 이렇게 높은 수준으로 사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기독교 역사 중에, 또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높은 기준으로 사시는 크리스챤 들이 계십니다. 존경받아 마땅한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분들입니다. 두번째 해석은, “율법주의를 타파하는 것이야 말로 율법의 완성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잘 지키는 게 자기의 자랑이자 상급이요, 권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를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율법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까지 알려주면서 진짜 율법을 지키려면 이 마음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살아낼 수 있는 바리새인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적으로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는 구약율법과 새 율법을 다 지켜서 되는 게 아니라 “성령 받고,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르려 하는 마음자세, 이것이 이웃에게 확대되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자세가 생긴 자가 바로 제자입니다. 진정한 제자로 산다는 것은 꼭 성인군자가 되어야 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사랑으로 든든히 세워지고, 나와 이웃 간의 관계가 긍휼과 사랑으로 바로 세워지면 이미 제자인 것입니다. 이런 분들 중 일부는 예수님이 오늘 제시한 기준에 도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못한 자들도 여전히 제자입니다. 지금은 모자라도 계속해서 제자로 살아가면 주님이 감동주시고 힘주셔서 언젠가 우리도 그렇게 변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자와 제자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제자로 초청하십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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