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예수의 실체를 받아들이십시요! (눅 8:26~39, 봉독 26~33)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관해 하나님의 귀한 지혜를 함께 배워가기를 소망합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이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거라사라는 이방인 마을로 가십니다.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다소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 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 자는 옷도 입지 않은 채(27), 무덤에서 산 지 오래 되었고(27), 수시로 귀신에게 붙들렸으며(29), 쇠사슬에 묶여도 끊고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습니다. (29) 사실, 살아는 있으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 있는 처참한 모습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그의 영혼을 붙잡는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이 군대귀신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귀신들린 자가 먼저 와서 예수께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소리칩니다.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악한 영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권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지껏,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던, 심지어 쇠사들도 묶을 수 없었던 그가 스스로 예수의 권세 앞에 무릎 꿇은 것입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풍랑도 예수님 앞에서 잔잔해진 것처럼, 군대귀신도 예수님 앞에서 잠잠해진 것입니다. 그의 이름 “군대”의 원어는 legion (레기온, 리젼)으로 로마군의 제대 이름입니다. (약 6천명) 군대귀신은 집단으로 함께 다니는 악한 영인데, 성경은 이런 집단적인 영적 존재가 있음을 말합니다. (눅 11:26) 당시, 이 지역은 모두 로마군 (레기온)의 통치를 받던 곳이었습니다. 로마 통치군이 주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찬탈한 것처럼 군대귀신도 이 사람에게 들어와 그를 통치하고 그 삶을 송두리째 찬탈해 갔습니다. 예수께서 군대귀신을 쫓아내시자, 군대귀신은 지옥대신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그들이 돼지떼에 들어갔고, 그러자 돼지떼가 비탈길로 막 뛰어가 모두 호수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난해구절) 이 말씀에서의 핵심 포인트는 ‘영혼 구원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돼지 떼의 죽음은 물론 큰 희생이지만,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한 영혼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눅 15장, 찰스 스펄전) 이 사건 이후,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사람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대조적입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인격적 회복”을 경험하고,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자원합니다. 군대귀신이 들었던 자가 예수의 증인이 된 놀라운 반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반면, 마을사람들은, 귀신들렸던 자가 어떻게 나았는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가득 차” 예수께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인적 권능과 권위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증인과 예수의 관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님을 누구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체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심지어 악한 영들조차 따르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이십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마을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아는 상식적인 세상의 모습이 아닌 것이 싫었습니다. 만약에 생길 지 모르는 추가적 희생이 걱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익숙한 일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떠나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우리도 단지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예수를 단지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시고, 좋은 분이신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분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합니다. 예수를 단지 아는 사람들은 교회다니는 것이 내 생활에 도움이 될 때는 좋아하지만, 내 삶에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올인하셨습니다. 제자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가치관을 초월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면, 삶이 변하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안 변하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려면, 나를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거라사에 일부러 찾아 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 (요 6:39) 예수님은 2천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를 구함으로써, 이 자가 얼마나 귀한 자인지 스스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한없이 비천하게 본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예수님은 그녀가 존귀한 하나님의 예배자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그들은 바로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 우리의 영적 모습은, 살아 있으나 사망권세에 얽매였던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친히 감수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예수의 증인으로 살려고 합니까? 아님, 마을사람처럼 살려고 합니까? 예수의 십자가와 예수의 은혜를 머리로 받지 말고 가슴으로 받읍시다. 그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한 통치자로 받아들입시다. 그 분의 은혜를 피부로 체감하고 잊지 맙시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의 증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귀신 들렸던 자가 그랬던 것처럼… 묵상과 나눔을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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