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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요 21:15-17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러 가지 모습들 중에 여러분 개인에게 가장 터치가 되는 스토리는 어떤 것인가요? 여러분은그 분의 어떤 모습을 보며 감동하고, 또, 그 분의 성품에 매료가 되시나요? 오늘은 여러 가지 예수님의 모습 중에서 두 가지 모습을 통해 주님의 진 면목을 알고, 그 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 첫번째는,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입니다. 자비란 어려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며, 긍휼은 가엾게 여겨서 돕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의 긍휼(Mercy)은 죄있는 자를 가엾게 여겨 죄를 사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주 대상은 세상에서 소외받고, 불쌍하고,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하듯 가끔 그들 필요 챙겨주는 식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공급하시고, 더 나아가 그들의 영혼까지 풍성해지도록 도우셨습니다. 이런 분은 우리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소위, ‘메이저’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감사합시다. 그런데, 그 반대라면 더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낮추시면 축복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인물들은 이 마음을 다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예수님, 낮은 자를 들어 쓰시는 예수님” 이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을 찾아가신 장면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만들어진 혼혈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당시 여성의 인권은 밑바닥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여인은 이미 다섯 번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 기준으로 봐도 가장 심각한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일부러 찾아 가십니다. 주님은 물을 기는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그녀의 평생 수치인 ‘남편’의 문제를 언급하십니다. 정죄하심이 아니라 공감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그녀에게 “영과 진리로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말을 전하는 내가 바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녀는 평생의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람 눈초리를 피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나병환자가 있습니다. 나병은 발병 즉시 제사장에 의해 진단받습니다. 나병으로 진단받으면 자연치유되기 전에는 평생 격리되어 살아야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수치와 괴로움의 삶입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그의 나병이 온 몸에 있었다고 의학적으로 기록합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한 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오기까지는 돌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나지막하게, “주여, 원하시면 저를 낫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니 깨끗함 받으라” 라고 말하셨고, 그 순간 그는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 이전에, 그에게 손을 내밀어 문둥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그 손길은 병에 대한 치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그가 겪었던 외로움과 서러움에 대한 공감과 위로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는 나병에 걸린 이후로 어느 누구로부터도 자기 몸을 터치해 준 경험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평생 예수님의 그 따스한 손길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과 긍휼이 여러분께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여러분의 가장 깊은 상처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따스한 손길을 내미시는 주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주님. 이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다음으로 보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자리에 예수님을 팔 가룟유다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의 발까지 닦아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이어서, 주님은 가룟유다를 생각하시며 그 심령이 너무 괴로워하셨다고 나옵니다. 왜 그렇게 괴로우셨을까요? 단지, 그가 자신을 팔 것 때문이라면, 굳이 예수님은 그의 발을 닦아줄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마음이 아니니까요. 예수님은 가룟유다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관심의 초점은 가룟유다였습니다. 계속해서 그가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마음을 사탄에게 열어 두었습니다. 결국, 그가 죄의 길을 택할 것과, 어떻게 그 생을 마감할 지를 아신 예수님은 그 마음이 너무나 괴로우셨던 것입니다. 이 마음은 마태복음 26:24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 지는 것은 정해진 것이지만, 그 화를 받는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면 좋았을 걸!” 탄식하시는 주님의 관심은 자신의 십자가가 아니라, 유다의 영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가룟유다와는 다른 종류의 실망감을 예수님께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수제자였고,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약함 때문에 신앙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를 찾아 가셨을 때 모습을 보면, 오직 베드로를 세우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심을 알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섭섭하실 수 있는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어떠한 죄도 용서하시는 초월적 용서입니다. 아무리 부끄럽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돌이키기만 하면 주님의 용서와 긍휼은 열려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받았고, 가룟유다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초월적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자신 없습니다. 다만 닮고 싶습니다. 너무나 고결한 모습입니다. 이 분께 나아가시기 원하십니까? 이 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원하십니까? 용서와 긍휼의 두 팔을 벌리고 계시는 주님께 나아갑시다. 세상에 다시 없는 멋진 분,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나눔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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