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도피성을 예비하라
민 35:9-34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도피성을 만들라는 명령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도피성 관련한 말씀은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서에 나오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과, 들어간 직후에 반복해서 강조하셨다면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꼭 이루시고자 하신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순한 사회 정의의 수단 이상의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도피성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도피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비교적 명확하게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즉, 살인할 의도가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도피성입니다. (11절)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레위인에게 주라고 명령하신 48개 성읍 중에 6곳을 뽑아 도피성으로 지정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중 세 성읍은 요단 동편에, 세 성읍은 요단 서편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럼으로써 이스라엘의 어느 땅에 사는 백성이든지 보복자로부터 피해 숨기 용이한 장소에 지정하셨습니다. 이처럼 도피성은 비의도적인 살인자를 구원하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살인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구체적 기준을 말씀합니다. (16-23절) 즉, 사람을 죽일 만한 위험한 물건으로 살인한 경우나, 명백한 악의로 살인한 경우는 죽일 의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경우에는 살인자는 도피성으로 도피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악의 없이 우연히 사람을 죽인 경우만 비의도적 살인으로 보았고, 이런 자들은 도피성으로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을 해할 만한 위험한 물건에 의해 사람이 죽은 경우에는 무조건적으로 의도성 살인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는 현대의 과실치사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들은 도피성 어귀에서 장로들에게 자기의 사건을 고백하고, 장로들은 그 사람이 비의도성살인인 경우에는 받아들여 그 성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일단, 그가 도피성에 들어가게 되면 성의 주민들은 그를 피의 보복자에게 넘겨주어서도 안 되고, 속전을 받고 고향에 보내주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두 가지 조건 중 하나가 만족되어야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는데, 하나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거나, 혹은 대제사장이 죽어야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재판의 경우는, 비록 의도는 없었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인 사실이 있다면 무죄판결을 받기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는 대제사장이 죽어야 그들은 자유함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궁금점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살인자를 보호하는 대책을 마련했을까’입니다. 율법은 살인자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가족이나 그 공동체가 죽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출21장) 특히, 고의로 살인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제단에서 잡아내려서라도 죽이라고 말할 정도로 엄하게 금지하였습니다. 이런 율법의 정신을 “동해동형법”이라고 부릅니다. 즉, 남에게 해를 입힌 만큼 본인도 형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잔인해 보일 수도 있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원칙을 강제할 수 있는 법안이었습니다. 이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죄를 너무나 미워하시는 마음, 인간의 생명을 존귀히 여기시는 마음,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시려는 마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율법을 처음 주실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비고의적 살인자의 생명을 보호할 도피성을 계획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출21:13) 따라서, 도피성은 살인죄를 금하실 때부터 이미 정하신 부분입니다. 그럼, 이런 도피성을 예비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어떻게든 살리시려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간절한 인간 구원의 마음은 도피성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서 눈여겨 볼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죄는 땅을 더럽힌다’는 표현입니다. (33절)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도,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도 성경은 땅이 저주를 받고, 땅이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말씀합니다. (창3-4장) 특히나 살인죄의 경우, 피해자의 피로 인해 더럽혀진 땅은 오직 가해자의 피로만 속함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33절) 이것은 죄에 대한 기본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 기본 원리를 깨고, 죄로 인해 더럽혀진 땅을 정결케 할 수 있는 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는 대제사장의 죽음이 살인자의 죄값을 대신 갚아준다는 ‘대속’ (Redemption)의 개념이 적용됨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렇게 속죄함에 있어 너무 중요한 대제사장이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서는 자들로 변질됩니다. 더이상 인간 대제사장이 인간의 죄를 속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속죄의 역할은 진정한 대제사장,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게 되신 것입니다. (히4:14) 따라서 이 원리를 도피성에 적용해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대제사장의 죽음입니다. 즉, 도피성은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살인자가 자유함을 받듯, 십자가 사건을 믿으면 죄인인 우리도 자유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의해 속죄의 대상이 더욱 확대됩니다. 도피성에서는 비의도적 살인자만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마음으로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살인한 자도 십자가 밑에 거하면 속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예수께서 마음의 법으로 죄의 기준을 높이신 것이 도리어 속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또한 도피성이 되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몸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죄 있는 자, 마음으로 살인한 자, 심지어 실제 살인한 자도 주님께 나오도록 품어주는 도피성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용납’이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가르치고 치리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용납을 버리면, 교회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왜냐면, 교회가 바로 도피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살인죄를 지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의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가 형제를 미워한 것을 근거로 하나님께 우리를 살인자라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의 고소는 성경에 근거한 팩트입니다. 우리에게도 도피성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십자가가, 교회가 도피성입니다. 그 아래로 들어오십시오. 그래야만 삽니다. 도피성 되신 주님을 사랑합시다. 우리 공동체를 또 다른 죄인의 도피성이 되도록 서로 용납합시다. 그것이 도피성의 의미를 아는 자가 취해야 할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나눔 질문 1. 나는 도피성에 피해 있으면서, 또 다른 살인자가 피해 오는 것을 비방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런 모습이 없나요? 2. 우리 공동체를 도피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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